▲ 김재영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실용주의 인사가 대표적이다.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는 요직 인선은 ‘워스트 오브 워스트’로 판명 났다. 그 면면이 어쩌면 그리 하나같이 각종 비리와 부조리로 도배된 삶을 거쳤는지. 게다가 이들은 그것이 왜 문제인지조차 자각하지 못할 만큼 전도된 가치관과 도덕 불감증에 빠져 있다. 이를 눈감아 주더라도 고위 공직자로서 이들이 갖고 있는 전문성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실용주의에 걸맞은 능력 중시와 적재적소 원칙이라는 수사(修辭)는 실상 1% 인사들의 과거 허물을 감싸기 위한 포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은 실용주의를 20세기에 만연했던 ‘시장주의’와 동일시하는 듯하다. 그는 취임사를 통해 ‘선진’이란 용어를 15번, ‘기업’을 14번, ‘경쟁’을 9번이나 입에 올렸다. 선진화의 요체는 기업의 자유로운 운신과 무한경쟁에 있음을 다시금 천명한 것이다. 시장을 맹신하는 사실 자체도 문제지만 사회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실정을 감안할 때 위험천만한 사고 구조다. 지금 당장 기업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고 한반도 대운하 같은 ‘개발’ 패러다임이 횡행한다고 가정해보라. 환경 재앙은 말할 것도 없고 부의 쏠림 현상이 가속화될 것은 불 보듯 훤하다.
이 대통령의 실용주의는 교육도 경쟁 위주로 재편하는 것이다. 벌써부터 3불 정책 폐지가 기정사실화되고 영어몰입교육 같은 설익은 정책이 가세하면서 사교육 광풍이 불어 닥치고 있다. 그 수혜자는 누구일까? 수도권 소재 명문대학과 대형 사설학원, 천정부지로 치솟을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는 부잣집 자제들에 한정될 것이다.
‘그들만의 실용주의’란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교육복지를 통해 가난의 대물림을 끊겠다고 언급했다. 가난이 세습되는 세태를 문제 삼은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대표적 공공 영역인 교육마저 경쟁과 시장이란 블랙홀에 밀어 넣으면서 균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할 묘수가 있을까? 경쟁과 균등이라는 이율배반의 조화가 실용주의적 교육의 목표라면 한쪽은 립서비스에 불과할 뿐이다.
집권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실용주의의 정체가 하나 둘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결국 99% 국민의 눈총을 불사한 1% 내각도, 1%와 99%의 양극화를 부채질할 시장만능주의도, 1%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교육정책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특권층 맞춤형 정책 원리인 셈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향할 곳은 1%의 강자가 아니라 99%의 약자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가치와 이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다. 오히려 제대로 된 가치와 이념부터 정립하는 게 순서다. 그리고 그 기반은 경쟁보다 나눔의 정신이어야 한다. 이것이 경제적으로도 이익이다. 인도의 간디가 이를 몸으로 실천한바 있다.
그는 기차가 출발하면서 신발 한 짝이 플랫폼으로 떨어지자 남은 한 짝을 급히 그곳으로 던졌다. 사람들이 놀라서 묻자 “신발 한 짝은 아무에게도 쓸모가 없지만 두 짝이 되면 누구에게나 쓸모가 있지요”라고 답했다. 경제학적으로도 남은 한 짝을 던지는 것은 손실의 증가가 아니라 배려를 통한 사회 후생의 증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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