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재성 배재대 명예교수 |
지금은 불타버린 남대문의 1900년대 옛 그림을 보면, 문밖으로 골목길에 다름없는 길 한줄기가 빠꿈이 뚫려있고 그 양쪽으로 올망졸망한 집들이 널브러져 있다. 길은 오로지 사람과 우마차 두어 대 지나갈 수만 있으면 족했던 것으로 본 모양이다. 이정표로 삼기 위해 5리마다 나무를 심어놓고, 이름을 오리나무라 했다던가. 허나 ‘신작로`라는 자동차 중심의 길이 생기고 그 양쪽으로 나무들이 들어서면서 가로수 모습은 보기 힘들지 않았다. 지중해 연안국가들을 손아귀에 놓고 500여 년간을 뒤흔들던 로마. 사방으로 통하는 길에도 영락없이 가로수가 있는 것을 보면 길과 나무는 실과 바늘이라 해서 과히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도시에 심겨진 나무들은 도시의 얼굴을 다듬어준다.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하며 공기를 깨끗이 해주는 직접적인 효과는 물론, 콘크리트 건물에서 풍기는 답답함에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나무들의 존재는 그래서 돋보인다. 전통적으로 교통이 발달되었던 나라의 국민들은 길을 탈것들의 전용으로만 목적을 채우지 않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지나다니는 공간은 물론, 잠시 쉬어가거나 간단한 음식물을 즐길 수 있는 쉼터로서 쓰임새를 넓혀간걸 가지고 약삭빠른 상술이라고 비아냥거릴 필요는 없다.
자연을 향한 도시에서 사회적 태도를 가치의 연속체로 본 생태학자 『신톤』의 시각은 그르지 않다. 네 가지 형태의 사회적 태도 중, 도시민들이 가장 편하게 여기는 것은 자연을 원상태와 비슷하게 복원하여 주기적인 접촉을 통한 정신적 삶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도심과 가로변에 나무가 있어야 하는 모든 이유를 압축한 표현이다. 거리의 나무들이 그리고 숲이 시민들에게 쾌적함을 주고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한다면 이걸 거절해서는 안 된다. 거리는 단순히 지나가면 그만인 그런 공간이 아니다. 최소한 머물러야 함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공간이 있어야할 당위성은 그리 작지 않다. 머물면서, 그리고 즐기면서 햇빛을 조금은 가려주고, 비도 얼마쯤은 차단해 주며, 강풍을 미풍으로 되돌리는 미기상 변화들은 나무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혜가 개인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여겨졌을 때 얼마의 증오로 표출된다. 나무로 인해 간판이 가려 장사에 지장을 가져온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튄다. 중앙분리대 때문에 손님의 손짓을 간파하기 어렵다는 택시기사들의 볼 멘 소리도 만만치 않다. 간판이 눈에 띠어 길가에 불법 주차해 놓고 물건 사러 그 집에 들어가는 상행위에 너무 익숙한 탓일 께다. 반대편 길가에 서있는 손님을 태우기 위해 용감하게 중앙선을 가로질러야 하는 찰나의 편리가 불가능한 데서 생긴 불평일지도 모른다.
『풀레』식으로 표현하자면 제한적 공간집착을 선호하는 현상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도심 속의 나무들은 시련을 겪고 있다. 쑥쑥 자라는 나무가 얼마나 미웠으면 치장은커녕, ‘묻지마`톱질을 마구 해대는 고약한 심뽀. 어쩔 수 없이 나란히 서있어야 할 권리마저 끝내 전봇대에 양보해야 하는 운명도 우리에게는 안타깝기만 한데 말이다. 나무는 나무를 사랑하고 나무에 생명을 걸만큼 의존도가 강한 자에게만 그 혜택이 돌아간다고 한『신튼』의 지적이 자꾸 생각난다.
우리나라의 1인당 에너지 소비는 세계 5위, 온실가스 배출량은 10위를 기록하고 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겨울철 반바지 차림으로 지내는 웃지 못 할 우리네 낭비성향이 환경 낙후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미국 예일대와 컬럼비아대 연구진이 발표한 세계 환경성과지수를 보면 우리나라는 이산화황 배출량이 세계에서 제일 많은 나라에 속한다. 경제규모는 세계 12위로 자랐지만, 우리의 환경여건과 관리능력은 후진국 수준을 맴돌고 있다. 이런데도, 심지는 못할망정 나무에 가려 장사 안 되니 베어내 버리라는 목소리를 계속 높일 것인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