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불치병 아내와 동반자살
60년 변치않는 사랑에 가슴따뜻
사랑의 유효기간은 3년, 도파민과 프로락틴, 아드레날린, 그리고 옥시토신. 몇 가지 호르몬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과학적` 사랑학이 당연시되는 요즘. 두 사람이 남기고 간 질기고도 절절한 사랑의 이야기이며, 2007년 가장 감동적인 사랑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어느 사랑의 역사 바로 'D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2007년 9월 24일 세계 언론은 한 프랑스 철학자와 그 아내의 죽음을 긴급히 타전했다. 평생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심층 분석한,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 앙드레 고르(84세)가 불치병으로 고통받아온 아내 도린(83세)과 시골의 자택에서 나란히 누운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동반자살이었다. 현관문에는 “경찰에 알리시오”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고 두 사람이 누운 침대 곁 탁자 위에는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장례 방법을 세세히 부탁한 편지 다발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화장한 재를 둘이 함께 가꾼 집 마당에 뿌려달라고 유언했다.
사르트르가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고 평가한 앙드레 고르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공동 창간한 언론인이기도 하다. 신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자 녹색정치의 창시자로, 또 언론인으로 전후 유럽 지성계의 한복판을 통과해온 그는 아내가 척추수술 후유증으로 불치병에 걸리자 1983년 이후 모든 사회 활동을 접고 아내를 간병해 왔다. '르몽드' 등 유럽의 유력 신문들은 이 부부의 사랑과 비극적인 죽음을 기리며 다투어 특집 기사를 쏟아냈다. 그리고 이런 추모 열기의 한가운데, 그가 자살하기 1년 전 아내를 위해 쓴 『D에게 보낸 편지-어느 사랑의 역사』가 세계 출판계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84세의 남편이 스무 해 넘게 불치병과 싸운 83세의 아내에게 보낸 연애 편지인 『D에게 보내는 편지』는 한 남자의 한 여자에 대한 뜨겁고 강렬한 사랑의 심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돈도 없고 국적도 없는 유대인 앙드레 고르에게 영국 여자 도린 케어는 혜성처럼 등장하여 경제적 능력이 없는 고르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으며, 고르가 힘들고 괴로워 할 때마다 따뜻한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1974년 아내 도린이 근육위축 병에 걸리자 고르는 다니던 신문사를 퇴사하고 아내의 병시중을 들기 시작했고 스무 해가 넘는 기간 동안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다. 죽음이 임박해서는 아내가 없는 세상은 텅 빈 세상일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며 자신의 존재이유가 상실되었음을 고백한다. 결국, 2007년 9월, 60년 동안 흔들리지 않았던 둘의 사랑은 동반자살함으로써 고르 자신의 고백을 완성한다.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오직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함께한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나는 많이 울었습니다. 나는 죽기 전에 이 일을 해야만 했어요. 우리 두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우리의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 나는 책과 자료집을 내려놓았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해온 것들이 말해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죽는다면, 사람들이 도린에 대해 무엇을 알겠습니까? 나는 『배반자』를 제외하고는 아내에 대해 쓴 적이 없습니다.
그 책에서 아내는 잘못 그려졌어요. 나는 존재했던 이에 대해 무엇인가 바로잡을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려면 아내에게 말을 거는 형식으로밖에 쓸 수 없었어요. 나는 이 책을 상상 속의 대중을 위해 쓴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내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여든세 살의 철학자가 여든두 살의 아내에게 바친 편지는 고르 부부의 동반 자살 이후 더욱 주목받고 있다. 사랑과 헌신과 감사로 가득 찬 고르의 글, 죽음으로 봉인한 이 사랑편지는 독자들의 가슴을 공명한다.
마치 영화 같은 그들의 러브 줄거리에 굳이 빈정거릴 필요는 없다. 또한, 동반자살로 종결된 그들의 죽음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필요도 없다. 에로스의 농밀함이 점점 밋밋해져만 가는 작금의 시대에 서로 위해 존재했고, 전적으로 사랑했던 그들의 삶은 아름답고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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