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현란한 아파트 광고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거실에 산소 물고기가 날고 안방에 땅 새가 둥지를 틀어서 알을 품을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다. 고색창연한 성으로 둔갑한 공간에서 주인 내외는 성주와 마나님이 되고 자녀는 공주와 왕자가 되는 꿈을 꾼다. 무서운 것은 그것이 착각이나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데 있다. 광고를 통해 건설사들은 ‘이름` 있는 아파트에 살 수 있는 분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간단히 분리해 버린다.
얼마 전 태안에서 규모는 작지만 의미 있는 세미나가 열렸다. 인류학자·사회학자·해양생물학자·보건환경학자·언론학자들이 모여서 작년 12월에 터진 기름유출 사고에 대한 언론보도를 평가해 보는 자리였다. 참석자들은 이번 사고에 ‘태안`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국제관행에 따르면 기름유출 사고에 대한 이름은 두 가지 방식으로 붙여진다. 유정 사고로 인해 해상에 기름이 유출될 경우 해당 유정이 위치한 지역의 이름을 붙이고 유조선이 좌초하는 등의 사고로 기름이 유출되면 사고를 낸 유조선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은 홍콩선적 유조선 허베이 스피릿호와 삼성중공업 소속 크레인선의 충돌로 인해 발생했다. 언론이 이번 사고를 ‘태안 기름 유출사고`나 ‘태안 원유 유출사고`라고 이름 붙인 것은 어느 면에서건 터무니없다는 것이다.
사고를 일으킨 당사자들이 엄존하는데, 더욱이 유정은커녕 유전의 기미조차 없는 태안이 왜 ‘태안 기름 유출사고`란 오명을 뒤집어 써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아는 것이 병이라는 옛말이 있지만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정작 알아야 할 것을 제대로 모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습진과 무좀이 한결같아 보이지만 전문가들은 이 둘을 구분하고 각기 다른 처방전을 내놓는다. 이번 사건이 결코 ‘태안` 기름유출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쉬운 습관처럼 ‘태안`사고라고 보도한 언론행위는 태안에 두 겹 세 겹의 가중된 피해를 안겼다.
`태안‘이라고 이름을 붙임으로써 사건의 본질이 흐려졌다. 사건의 가해자, 원인 제공자를 제대로 규명해야 사고수습의 가닥을 올바르게 잡을 수 있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아는 기본 정석이다. 태안은 피해자다. 그런데 언론보도는 오히려 독자와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기름유출 사고의 원인제공자로 ‘태안`을 전제하게 하는 우를 범했다. 태안 기름 유출사고라는 이름의 장막은 가해자들이 은폐하고 엄폐하기 좋은 서식처였다. 태안이라고 이름을 붙여 태안에서 온전하게 나고 자란 갖가지 농수산물의 유통과 소비에 치명상을 입히기도 했다. 태안산 농산물의 오염을 의심케 하고 태안 바닷가의 가게 문이 열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놓고선 한편으로, 태안산 생선을 먹는 쇼를 중계하며 태안을 살리자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모르고 한 것까지야 바로잡으면 될 터이니까 그나마 낫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태안`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도 ‘광고` 수입이라는 미끼에 눈이 밝아 ‘태안 기름 유출사고`라고 불러 왔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거나 이번 사고에 절망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민들의 처절한 죽음의 사회적 원인을 파헤치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대신 일부 언론은 가해자들이 제공한 안락한 숙소를 이용하면서 ‘아름다운` 자원봉사자 보도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고 이번 사건의 피해자를 마치 가해자로 오인할 수 있도록 ‘태안`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도했다. 그러한 언론의 행태는 서울 언론과 우리 지역 언론 간에 아무 차이가 없다는 지적과 반성을 낳게 했다.
어떤 현상이나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더러 재밌기도 하고 손쉽기도 하다. 장난스레 이름을 붙여서 불러보는 일도 잦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함부로 손쉬운 이름을 붙여 사회적 낙인을 찍거나 게으름 때문에 사건의 본질과 관계없는 잘못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데 사용될 흉기 제작 행위와 다르지 않다. 아집과 독선, 편견과 차별적인 사이비 정책행위들이‘실용`이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돼 유통되는 일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름에 속아 이름 안에 감춰진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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