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문휘 충남도 향토문화연구소장 |
주인의 평상시 느긋한 행동에 그것 봐라하는 졸음 같다. 설날을 앞둔 사람들의 대대적인 이동을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지상에선 대서특필이다. 뭐가 그리 떠들썩한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평안한 사람들의 쓴 소리도 있었겠지만 바쁘고 서두르며 차리는 명절이 설날이다. 이렇게 떠들썩하다가도 설날이면 쥐죽은 듯 고요가 깃드는 날이 첫 해 첫날의 명절날이다.
80평생을 살아오면서 보는 설날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일정시대 구정, 신정으로 나누고 이중과세를 할 때에도 신정 때는 형식적인 차례답게 꾸벅하고는 구정 때는 친지가 모여들고 찾아가고 조상을 섬기기 위해 백 리가 멀다고 성묘하러 다니던 그 풍속을 오늘에도 여전히 따라 하고 있다. 참 풍속 처 놓곤 고집도 센 풍속이다.
그 재래적인 전통을 1896년에는 세역을 양력으로 바꾸며 풍속의 변화를 인위적으로 조성하여 신정을 강요하기도 하였으나 여전한 설날은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가 아니었던가. 포악한 일제의 탄압아래에서 세찬을 준비하기 위해 밤에 산중에서 도살을 한 육류를 치마폭에 가리고 몰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부엌으로 들어서는 아낙네들의 고충이나 세무서원들의 감시를 피해 산속에 술 단지를 묻고 술을 익혀 땅을 파고 세 주를 나르던 고충도 일제시대의 산물이지만 억세게도 지키기 위해 눈치를 보며 맞이했던 설날이 일정시대의 설날이었다.
그렇게 지켜온 설날을 우리의 얼을 찾고서도 40년이 지난 1985년에는 민속의 날이라 하였던가. 참 웃지 못 할 경축일로 정해 농촌에서도 허허 웃으며 뭐 설날이 민속의 날이라니 하며 설날의 전통을 지켰다. 드디어 1989년에는 설날이라고 지칭하게 되자 그제야 내놔라하는 설날로 부르게 되었으니 설날의 고통도 100년이 지나서야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것도 한때 우리의 한 서러움이 아니었던가?
본시 전통과 풍속의 형성이란 어떤 힘으로 금방 이룩되지는 않으며, 몇백 년 혹은 몇천 년 비적되고 풍화를 거듭하면서 비로소 안으로부터 뿌리가 내려진다는 것을 너무도 모르는 자들에게 우리 서민들의 고집과 재량도 대단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증이 설날의 보람도 된다.
설날이라는 언어로 해설해서 설은 새해의 첫머리가 되며 설날이란 새해의 첫날이란 뜻이다. 묵은해가 지나고 새해의 이 첫날이 앞으로 한 해의 운수를 좌우한다 하여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사(邪)를 다스리고 복을 부르는 날로 삼았던 것이다. 오늘날의 설날 연휴에는 휴가와 오락의 요소가 상당히 섞여 있으나 본래는 겸손에 따른 제사 드리는 날로 설빔 즉 세장을 하고 일 년 내내 아무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도록 행동을 조심하며 그해 농사에 관계되는 갖가지 축원을 하는 날로 삼았었다. 그래서 설날에는 그 축원의 분기에 따라 놀이와 풍습도 차례, 복조리, 야광귀, 머리카락 사르기 등으로 묵은 것을 자르며 새것으로 바꾸는 날로 철저했던 것 같다.
설날을 준비하느라고 떠들썩하다가도 그 해의 새날이 돌아오면 부엌의 그릇 닦는 소리도 조심하며 신인을 맞이하고 모두가 겸손하게 일년의 복을 기원하던 날이 설날이었다. 전통과 풍습은 그 민족에겐 가장 큰 재산이다. 그 변화는 세월에 따라 조금씩 변화는 때라도 몸통을 잘라내는 변화는큰 재난을 자초한다는 말에 생각난다. 그 힘들었던 36년간의 일제 강점기에도 고고하게 명맥을 유지한 설날의 풍속은 그래서 우리 모두의 재산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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