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에 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고민에 빠질 법하다. 선택할 가짓수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설에 맞춰 개봉하는 한국영화만 무려 6편. 가짓수가 많다는 건 관객에겐 행복한 일이지만, 문제는 다들 고만고만해 “이거다” 싶게 선뜻 선택할 영화가 마땅치 않다는 것.
즐겁자고 간 극장인데 골치 썩이지 말자. 먼저 어떤 식의 영화를 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명절영화는 특성상 코미디 아니면 가족영화다.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르면 반은 해결된 셈.
코미디를 보고 싶다면 ‘원스 어폰 어 타임` ‘라듸오 데이즈` ‘6년째 연애중` 가운데 하나를 고르면 된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실컷 웃고만 싶다면 ‘원스 어폰…`을 권한다. ‘라듸오 데이즈`는 개성 강한 출연진들이 돋보이지만 웃음의 강도는 심심한 편. 로맨틱 코미디 ‘6년째 연애중`도 ‘동갑나기 과외하기`의 즐거움보다는 ‘싱글즈`의 진지함에 더 가깝다.
가족영화로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가 있다. 착한 사람의 착한 이야기다. 인물묘사가 재치 있고 편집의 리듬도 흥겹다. 설 시즌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영화로는 유일하다. 하지만 너무 교훈적인 것이 흠.
“울고 싶다”는 관객에게는 당연히 ‘마지막 선물`을 추천한다. 신파 냄새 풀풀 나지만 순박한 가족의 의미와 가족애를 느끼고 싶다면 딱 이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이 설 연휴까지 질주를 계속한다면, ‘우생순`도 강추. 한국 핸드볼 낭자군이 재경기 끝에 베이징 올림픽 진출권을 따냈으니 박수를 보내는 뜻에서라도 꼭 보아야 할 것 같은 의무감도 든다.
“나는 무조건 액션!”이라는 관객은 진가신 감독의 대작 ‘명장`이 기다리고 있다. 대규모 전쟁신 등 볼거리가 많지만 액션보다는 광기어린 시대, 개처럼 싸웠던 사내들의 초상에 초점을 맞췄다. 심각하고 무겁다.
설 영화로는 드문 경우지만 스릴러도 있다. ‘더 게임`은 연기파로 꼽히는 신하균 변희봉 두 배우의 1인2역 연기가 관심을 모은다. 신체를 서로 바꾼 두 사람. 변희봉의 신하균, 신하균의 변희봉은 어떤 모습일지.
할리우드는 딱 한 편만을 내놨다. 톰 행크스와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을 맡은 ‘찰리 윌슨의 전쟁`이 그 것.
‘동방의 빛`을 둘러싼 한판 소동극
▶원스 어폰 어 타임=석굴암 본존불상의 이마에서 빛을 내던 전설의 보석 ‘동방의 빛`. 이를 차지하려는 사기꾼과 희대의 도둑, 독립운동가와 일본군이 벌이는 한판 소동극. 박용우가 화려한 말발의 사기꾼으로, 이보영이 ‘반도 제일의 가수`이자 희대의 도둑으로 카리스마는 약하지만 재기발랄한 연기를 보여준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로 딱. 12세 이상.
조선 최초의 방송국에선 어떤 일이
▶라듸오 데이즈=1930년 경성. 조선에서 유일한 경성방송국의 천하태평 한량 PD 로이드는 조선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 ‘사랑의 불꽃`을 만들기로 한다. 애드리브를 일삼는 재즈 여가수와 ‘오버 액션`의 기생 등이 모여서 만드니 방송 사고는 진작 예약된 셈. ‘날방송`을 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흥미롭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별다른 기복이 없어 심심하다. 12세 이상.
오래된 연인의 티격태격 연애담
▶6년째 연애중=옆집에 사는 다진과 재영. 오랜 연애 끝에 연애의 긴장감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거의 부부사이다. 그러나 각자의 눈앞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청춘 로맨틱 코미디를 연상시키지만 ‘서른 즈음의 여자`라는 현실적 고민에 무게가 실려 있다.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용 무비로는 그럭저럭 볼만한 편. 15세 이상.
우리 시대의 소박한 슈퍼히어로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자신을 슈퍼맨이라고 믿는 엉뚱한 사나이와 그 사나이를 취재하는 휴먼다큐 PD의 소박한 판타지. 슈퍼맨이 하는 일이라고 해야 할머니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소소한 선행이지만 그런 선행으로 ‘현재를 바꾸면 미래도 바뀐다`고 영화는 외친다. 메시지보다 주근깨 가득한 전지현의 ‘쌩얼`을 볼 수 있다는 데 더 관심이 가는 듯. 전체관람가.
아버지로 변주한 ‘미워도 다시 한 번`
▶마지막 선물=간질환을 앓고 있는 친구의 딸에게 간을 떼어주기 위해 귀휴를 얻은 무기수. 그는 오로지 도망갈 생각뿐이지만 어린 딸이 자꾸 눈에 밟힌다. 낳은 정과 기른 정이라는 ‘미워도 다시 한 번`식 설정을 엄마가 아닌 아빠로 변주해 놓았다. 허준호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신파 냄새 풀풀 풍기지만 순박한 가족의 의미를 느끼고 싶다면 강추다. 15세 이상.
사내들의 형제애? 미친 짓이다
▶명장=태평천국의 난으로 어지럽던 19세기 중엽 청나라. 의형제를 맺은 세 남자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렸다. 이연걸 유덕화 금성무를 한 화면에서 본다는 게 강점. 대규모 전쟁신, 정소동이 안무한 리얼 액션보다 비극적 운명에 휘말린 세 남자의 표정에 무게가 실린다. 그려, 사내들의 의리니 형제애니 하는 거 따지고 보면 허울뿐인 명분이지. 청소년 관람 불가.
“이기면 3억 원 주마, 지면 몸을 내놔”
▶더 게임=돈 많은 노인 노식. 우연히 만난 가난한 청년 희도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희도가 이기면 3억 원을 주되, 지면 몸을 내놓으라는 것. 43년 연기 경력의 변희봉과 10년차 신하균이 각각 노식과 희도 역을 맡았다. 두 사람이 한 영화에서 역을 맞바꿔 1인2역을 하는 것도 흔치 않은 경우. 하지만 영화는 아쉽다 싶을 만큼 기대에 값하지 못한다. 15세 이상.
톰 행크스는 역시 아메리칸의 상징
▶찰리 윌슨의 전쟁=마약과 섹스 스캔들에 연루된 하원의원 찰리 윌슨. 망나니 같은 CIA 요원과 미모의 극우반공주의자 로비스트와 손잡고 소련의 침공으로 곤경에 빠진 아프칸을 돕는다. 저마다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사람들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인간 승리 드라마. 실제 사건을 미국인의 시각에서 풀어냈다. 오랜만에 톰 행크스와 줄리아 로버츠를 만나는 재미. 15세 이상. /안순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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