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의 속임수지. 복중에 슬쩍 입추를 끼워놓는다든가, 어감으로 혹한이나 혹서의 괴로움을 덜려는 천진한 속임수야.” ―박완서 『나목』에서
그나마 살아남은 몇몇 절기 속담이 간신히 체면치레를 하고 있다.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도 그중 하나다. 한식과 청명이 같은 날이거나 하루 사이로 연이어져 생긴 말이다. 지난 주말 계룡산 등반을 마친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측에서도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라며 신당 창당 얘기까지 불거졌다. 그들 말마따나 올드보이들이 설쳐대고 물갈이론이 무성하니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의미일까. 그런 기류는 내홍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한나라당의 공천 갈등에도 잠재되어 있다.
▲ 박수근 목판화 ‘나목과 여인` |
다르지만, 이판사판이니까 한식이거나 청명이거나 죽자는 주의(主義)라면 국민 보기에 똑같을 것이다. 새 정부 일은 새 정부가 알아서 하라고 생떼(한나라당 표현은 “뗑깡”) 쓰듯 하는 대통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에라, 이왕 물러날 것, 청명에 사라지나 한식에 사라지나 무슨 차이냐며 처삼촌 산소 벌초하듯 무성의하게 일관하는 것도 요샛말로 ‘밴댕이 소갈딱지`다. 피에르 신부의 사람 나누는 기준인 ‘타인과 공감하는 자와 자신을 숭배하는 자`의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감정을 추운 날씨에 도사리는 나목 속 가련한 남녀의 작은 속임수에는 애교나 애처로움이 있었다. 탈당쯤, 투정쯤이야 기본 옵션으로 여기는 권력지향적 정치인들은 그러나 감동은커녕 한식에든 청명에든 죽자고 마구 달려드는 자포자기의 불나방 같다. ‘정성이 있으면 한식에도 세배 간다` 했다. 한식날 ‘내 나무`심고 밑에 거름 주는 걸로 처자를 향한 연모의 정을 달랬던 갸륵한 전통은 또 어떻고! 그런데 죽겠다고? 아무 때나 어디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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