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요한 목원대 총장 |
잘가라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고개를 돌리고 얼른 공항을 빠져 나왔다. 집에 돌아와서도 섭섭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어서 괜히 자식이 머물던 방에 들어가 앉아있어도 보고 계속 기웃거렸다. 내 눈치를 아는 아내가 이젠 진정하라고 위로해 주었지만 자식을 떠나보낸 아비의 허전한 마음은 무엇으로도 쉽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래전의 일이다. 40여년 전 큰 누이가 미국으로 시집을 가던 때의 일이다. 미국에 계신 목사님의 중매로 사진으로만 맞선을 보고서 결혼을 결정하고 머나먼 미국으로 시집을 갔다. 누이가 떠나던 날 온 식구는 김포공항으로 가서 큰 누이를 배웅해 주었다. 큰 누이를 실은 비행기는 이륙하자마자 먼 하늘 저 너머 수평선 뒤로 금새 사라져 갔다.
나는 그때 사라져가는 비행기를 정말 삼킬 듯이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어찌나 강렬히 비행기를 쳐다보시는지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나는 움찔했다. 어린마음에 비행기가 날아가지 못하고 아버지의 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벌개진 아버지의 눈은 비행기가 사라진 후에도 그 쪽을 향해 오래도록 떠날 줄 몰랐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내가 다니던 한국 이민 교회에는 한국에서 은퇴하고 이민 오신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나이는 70살이 넘어선 듯 했다. 할아버지는 장로셨는데 교회에서 늘 자식자랑을 했다. 자식을 다섯 낳았는데 첫째는 미국에서 의사이고, 둘째는 교수이고, 셋째는 또 의사이고, 다섯째는 부동산 사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자식자랑중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분명히 자식을 다섯을 두었다고 했는데 항상 4명의 자식에 대해서만 자랑을 하고, 넷째 자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어느 날 교인 몇 명이 모여서 식사를 같이하고 고향얘기를 주고받다가 우연히 교인 한 분이 그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혹시 실례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번째 자제분은 무슨 일을 하시고 계시나요?”
할아버지는 더듬더듬 이렇게 대답을 했다.
“넷째 자식은 딸이 있는데, 캐나다에서 자식 셋을 낳고 잘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3년 전에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분명히 땅에 묻긴 묻었는데 지금도 나는 내 딸과 아침 점심 저녁에도 계속 마음속으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는 아직도 내 딸이 살아있어요.”
나는 그 날 집으로 돌어와 밤이 깊어가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분명, 죽어 떠나갔는데도 보내지 못하고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 아!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먼저 떠난 딸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세상을 살다보면 보내고 그리는 정 때문에 잠 못 이루는 경우가 이뿐이랴. 보내고 싶지 않지만, 아니 보낼 용기가 없어도 보내야 하는 절인 마음을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가 누이를 보내는 동생이 딸을 묻어버린 아비가 아닐 지라도 필부라면 한번쯤 가슴을 쥐어짜며 몇 날을 눈물 흘린 적 있으리라.
하지만 곧 스스로를 위로한다. 자식의 앞날에 더 큰 영광을 위해 나의 선택이 옳으며 부모의 희생은 당연한 거라고, 미국은 이곳보다 평화롭고 누나는 더 행복할 거라고, 우리 딸은 천국에서 편안한 삶을 살 거라고….
그리고 나는 믿는다. 지금 보내는 이 슬픈 눈물이 훗날 다시 만나 기쁘고 행복한 눈물이 되어 우리 모두를 축복해 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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