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숙 충남여성정책개발원장(공주대 교수) |
외교관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오프 더 레코드`라는 언사를 구사하지만 지켜지지 않을 때가 많다. ‘노 코멘트`라는 답변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당장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겠지만 외교관 역시 언젠가는 언론과 의회, 그리고 국민으로부터 검증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국익 우선이라는 판단의 잣대도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 1971년 미국의 대니얼 엘스버그 기자는 베트남전에서의 고엽제 살포에 대한 국가 기밀이 담긴 국방성 문서를 뉴욕 타임즈지에 보도했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철수했다. 국가 기밀을 보도했을 때 엘스버그 기자는 국익에 반한 행동을 했다는 질타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그는 용감한 기자로 평가된다. 이라크전 때 아부 그레이브 감옥소에서 발생한 포로학대 사건을 보도한 미국 기자 역시 처음에는 국익에 배치된 일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는다.
부산에서 개최된 APEC회담에서 후진타오는 “중국은 다른 나라의 성장에 위협이 되는 나라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와 지역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번영에 기여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중국은 아직도 경제발전에 장애가 많은 개발도상국가입니다”라고 연설했다. 기자들은 이 연설 내용을 보도하면서 기사의 제목을 ‘후진타오의 애교공세`라고 했다. 포스트 팍스 아메리카나를 꿈꾸는 대국 중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경계이다. 그래서 평화롭게 일어난다는 뜻을 지닌 ‘화평굴기`라는 국가의 슬로건도 ‘화평발전`으로 바꾸었다. 혹시라도 “일어난다”는 표현이 다른 나라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리고 화평, 화합, 화해라는 삼화(三和)를 표방한다. 그러면서 중국은 도광양회를 이야기한다. 어둠 속에서 빛을 가리고 조용히 칼을 간다는 뜻이다. 후진타오의 ‘애교외교`는 강하고 실력 있는 자의 여유 있는 겸손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전기를 집필한 로버트 올리브는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 선거를 무기한 연기할 것인지, 공산화의 위협을 무릅쓰고 통일을 시도할 것인지, 아니면 단독선거를 단행할 것인지의 갈림길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택한 이승만대통령의 판단은 현명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빵 덩어리 전체를 잃지 않기 위해 반이라도 확보하자는 지도자의 판단력이 중요함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는 많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있었던 터키와의 전투에서 그리스는 이스탄불을 점령한 후, 보스포러스해협을 건너 트로이까지 점령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결국 트로이까지 진격했던 그리스는 그 전투에서 패배했고 점령했던 이스탄불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가장 낮은 자세로, 그리고 겸손함으로 국민을 잘 섬기겠습니다. 희망을 드리겠습니다” 대통령 당선자께서 당선자로서의 첫 행보를 국립현충원으로 정하고 참배 후 방명록에 적었다는 글귀이다. 이번 대선은 건국 60주년, 민주화 20주년을 맞아 치뤄진 ‘중대선거`였다. 그러나 역대 대선 사상 63%라는 가장 낮은 투표율을 보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고심한 국민들의 착잡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면서도 48.7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보였다.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라는 측면에서 ‘회고적 투표`였던 셈이다. 이념갈등, 공리공론 등으로부터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국민적 소망이 극명하게 표출된 선거이기도 했다. 대통령 당선자께서 임기동안 진정성과 겸손함, 그리고 현명한 판단력이라는 지도자의 덕목을 지녀주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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