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춘아 유성문화원 사무국장 |
나는 역사시간의 연대기 외우기를 싫어했다. 생각해보니 몇 년도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것이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 해의 사건이 지니는 의미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다라는 문리를 터득하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 수첩의 월, 일에는 뭔가가 적혀있다. 나는 뭔가를 했다.
그러나 수첩의 뒤쪽 빈칸에 적혀있는 내용은 그 당시는 의미 있는 것들이라 생각돼 적어 둔 것이지만 스스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고등학교 시절 일기장의 메모와 아마도 비슷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왜 살아야하는지`,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지` 등의 그런 내용으로 쓰여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할매들 동창회에서 “야, 니 옛날하고 똑같다” 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제3자는 그 할매들의 모습에서 분명 나이를 보게 될 것이어서 할매들이 웃긴다 라고 여길 것이다.
웃기지 않는 할매의 이야기가 있다. 6월 한 일간지에서 박경리 선생을 인터뷰한 기사가 내 수첩에 메모돼 있다. “옛날 일 지금도 기억하세요?(질문)”, “그럼 다 생각나지 희한하게 날이 갈수록 생생해, 새벽에 계속 무언가가 쏟아져 나와 안쓰면 못 배기겠더라고, 그게 하필이면 내 가족 이야기라는게 이상해. 아마도 이제는 그때 일을 정리할 때가 됐다는 걸 내 몸이 먼저 아는 것 같아. ... 원래 먹어야하는 약이 많아. 하지만 혈압약만 먹어. 병원에도 1년에 두 번 정도만 가고. 살아보겠다고 날마다 약먹고 병원가고 하는 거 내 생명을 저울질하며 사는 것 같아서 싫어(대답)”
2007년이 지나가고 2008년이 온다는 것은 분명하고 나도 나이를 하나 더 챙기게 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렇게 분명한 연대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애써 모른 채 하면서 예나 지금이나 생각하고 있는 것은 비슷하다는데 방점을 찍고 있는 현재의 나는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일까. 연대기는 사건이고 그 사건으로 인해 내 삶에 무늬는 달라질지 몰라도 내가 바뀌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해 넘어가는 시점에서 분명히하고 가자는 것 일게다. 세상 뒤짚어질 것처럼 난리치는 건건 속에 스스로 매몰되지 않고자 하는 것 그것이 살아가는 힘이라고.
식구들 모두 저녁식사 약속이 있다고 하여 갑자기 덤같이 여겨진 시간에 잠시 방황하다 집으로 총총 발길을 돌린다. 나 혼자 밥과 김치를 먹고 싶기 때문이다. 배추김치와 무의 아삭아삭한 경쾌한 소리와 톡 쏘는듯한 맛에 입안 가득한 행복감을 씹는다. 이 맛이야! 배추김치를 입에 넣으며, 문득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다. 어릴 때 엄마는 김치 줄기부분을 잘라 물에 헹궈 밥 위에 얹어 주었다. 그리고 나도 내 아이에게 그렇게 해주었다.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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