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도둑맞은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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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밖]도둑맞은 달력

최충식 논설위원

  • 승인 2007-12-20 00:00
  • 신문게재 2007-12-21 21면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눈 깜빡일(瞬) 사이(間)인 순간. 구구한 설명이 불필요하지만 무엇이 순간인가는 상황별로 달라진다. 바람둥이에겐 찡긋 윙크하는 사이, 원숭이에겐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이가 순간이다. 어디에선가는 하마가 위험한지 어쩐지 고개 들어 휙 둘러보는 그 사이를 한순간이라 부른다.


그 짧은 순간도, 75분의 1초로 계산되기도 하는 찰나라도 아무도 가감할 수 없다. 로마의 원로원에서는 연설을 오래 끌려고 물시계 속에 진흙을 넣는 원로원 의원들이 더러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연설은 조금 더했을지 모르나, 아무도 시간을 줄이거나 늘리지 못한다.

그러기는커녕 나이 먹을수록 세월에는 속도위반 개념이 없다. 물리적 시간과는 다른 심리적, 생리적 시간이 존재한다. 수술대에서의 3분과 애인과 초콜릿 같은 밀애를 나누는 3분이 어찌 같겠는가. 시간 생물학이라는 것도 없는 바가 아니다. 몸 어딘가에 시계와 같은 무언가가 있어 때가 되면 기별하는 배꼽시계를 연상해도 좋겠다. 국내 한 과학자는 식물 생체시계 조절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밝혀내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잠이 오게 하는 것과 같은 생체시계를 조절하는 화학적 스위치를 찾아냈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 생체시계와 함께 인간의 시간관념이 전승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석기시대 제례 행사장인 영국의 스톤헨지<사진>를 보면 확신으로 굳어진다. 무려 28톤짜리 거대한 돌덩이 중 일부는 290㎞ 떨어진 채석장에서 옮긴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그곳이 하지와 동지, 춘분과 추분을 알아내는 등 달력 구실도 했다니 그 지혜가 놀랍고 선사시대 사람들조차 시간관념을 갖고 살았다니 그 생각에 숙연해진다.

문득문득 그런 숙연한 마음이 새 달력을 펼치니 또 든다. 달력 인심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사무실에 달력이 심심찮게 들어온다. 몇 장 더 얻어다 이웃과 나누었다.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달력 한 장 없는 집이 의외로 많다. 눈 어두운 어르신께는 글씨가 큼지막한 일력을 선사하면 “이 달력 다 뜯도록 살는지 몰라” 하며 어린애처럼 좋아하신다. 그걸 보는 순간, 이런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옛날 궁중의 나인들이 책력을 될성부른 서방님, 도련님들에게 돌렸다. 미리 인심 쓰고 후에 잘되거든 이자 쳐서 고봉으로 받자는 보험이었다. 한데 모를 게 사람일이라, 꼭 잘된다는 보장은 없다. 눈 빠져라 기다려도 소식이 없으면 흉을 보기 일쑤였다. 도둑놈, 달력 도둑놈 (역적.曆賊)이라고 말이다. 웃음 한 스푼 입가에 매달리게 하는 옛이야기다.

필자는 흘러간 날과 남은 날이 동시에 표시된 달력을 보며 한 해를 보냈다. 12월 21일은 355일 지나고 10일 남았다고 적혀 있다. 똑같은 걸로 내년 달력을 구했다. 시간을 아낀다고 아꼈지만 생체시계에는 잘 맞추지 못했다. 매순간을 아껴 최소한 달력 도둑은 면해야겠지만, 잘 때는 자고 먹을 때 먹고, 시계 유전자와도 잘 지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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