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의 사항]
① 제시문을 그대로 옮겨 쓰지 말 것.
② 적절한 글의 제목을 붙일 것.
③ 1600자(±100) 분량으로 쓸 것.
(가)
▲ 장도리 4컷만화- 경향신문 - |
(나)
내가 기억하기에는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일인데, 중국인이 한 명의 자녀를 대학에 보내는 데는 농민 30명의 노동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한 적이 있다. 이 학생이 5년 동안의 대학 과정을 마치면, 그 때까지 농민 150명의 1년분의 노동을 소비한 셈이다. 이러한 일이 허용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 인간을 5년 동안 대학에 보내기 위해 한 농민의 150년분의 노동을 충당해도 된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또 농민은 그 대신 무엇을 받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우리를 기로(岐路)에 서게 한다. 교육이란 ‘특권을 손에 넣기 위한 통행증`인가, 아니면 수도자(修道者)가 청빈(淸貧), 청결(淸潔), 순종(順從)을 맹세하듯이 스스로 떠맡는 의무 - 민중에게 봉사한다는 성스런 의무 - 일까. 전자의 길을 택하면, 교육을 받은 인도 청년처럼 유행의 첨단을 가는 봄베이 거리를 거쳐, 이미 거기에 모여든 선배들이 동료들을 서로 칭찬하는 사회 즉 ‘특권 계급의 조합`에 맞아들여지고, 교육을 받지 못한 대중에게 그 특권을 빼앗기지 않도록 경계하게 된다. 이것이 첫째 길이다.
후자의 길은 우선 마음가짐부터 다르고, 행선지도 다르다. 그 길은 150명분의 노동에 의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교육비를 지불해 준 민중에게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민중의 노동의 결정(結晶)을 소비하여 왔으므로, 돌려주는 것이 사람으로서의 의무라고 청년은 느낀다.
이는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레프 톨스토이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타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상대방을 누르면서 자신을 울러 메고 가라고 요구하고 그에게서 내리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이 사나이를 매우 동정하며 내리는 일 이외의 일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방의 상태를 편하게 해 주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자타가 모두 믿도록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우리가 풀어야 할 첫째 문제다.
교육을 받은 인간은 스스로 의무를 맡은 것이지, ‘특권으로 가는 통행증`을 손에 넣은 것이 아니라는 이데올로기 - 또는 어떤 호칭이든 상관없다 - 를 굳건히 확립시킬 수 있을까. 말할 것도 없이 이 이데올로기는 인류의 모든 훌륭한 가르침의 지지를 받고 있다. 나는 기독교도이므로 ‘누가복음`에서 인용하는 것을 허용해 주기 바란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한다.” 이는 정의(正義)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가 지지를 받지 못하고 교육이 특권을 얻는 자격증으로 간주되어 버리면, 교육의 내용은 민중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소수의 특권 계층은 그들을 특별 취급하는 교육을 원하므로, 아무래도 그릇된 것, 즉 육체노동이나 제 1차 산업에서의 생산이나 농촌 생활 등을 경멸하며, 민중과 유리되어 생활하는 일을 배우고 가르치게 될 것이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우선 예외 없이 자신을 나라에 봉사하는 자 - 즉 일반 민중에 대한 봉사자 - 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50만의 인도 농촌에서의 실업과 반실업(半失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도력의 발휘와 기술적 지식의 보급이 충분히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5억의 국민에 관련되는 문제다.
사람이 자조(自助)를 배우는 일을 돕는 데는 100명에 대해 적어도 2명의 조력자(助力者)가 필요하므로, 5억 명에 대해서는 1천만 명의 조력자를 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교육을 받은 인도인의 총수(總數)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불가능한 건 우주의 법칙 때문이 아니라 남에게 주지는 않고 탈취하기만 하는 사람들의 타고난 탐욕 때문이다. 실은 이 문제에는 해결될 가망이 보인다는 증거는 있다. 다만, 그 해결은 정치가에게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다)
사랑의 기술 실천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한 가지 태도는 이제까지 앞에서 언급했던 것이지만 사랑의 실천을 위해 기본이 되는 것이므로 분명히 언급되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활동`이다. 나는 앞에서 활동이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활동, 즉 자기 힘의 생산적 활용을 뜻한다고 했다.
사랑은 활동이다. 만일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사랑 받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상태에 있다. 만일 내가 게으르거나 끊임없는 주의·인식·활동의 상태에 있을 수 없다면 나는 나 자신을 사랑 받는 사람과 적극적으로 관련시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잠자는 것은 비활동을 나타내는 적절한 상황이다. 반면에 깨어 있는 상태는 게으름이 끼여들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현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역설적인 상황은 깨어 있을 때도 반쯤 잠들어 있고 자고 있을 때나 자고 싶을 때도 반쯤 깨어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깨어 있는 것은 지루해지거나 지루하지 않기 위한 조건이며, 지루해지거나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은 사랑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이다. 수용적 형태로든 축적적 형태로든 아니면 단순히 시간을 낭비하는 형태로든, 하루 종일 눈과 귀를 통해서 생각하고 느끼는 데 적극적으로 되고 내면의 게으름을 피하는 것은 사랑의 기술을 실천하는데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사랑의 측면에서는 생산적이고 그 밖의 측면에서는 비생산적이라는 방식으로 삶을 분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생산성은 그런 식의 분업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긴장과 고양된 생명력의 상태를 필요로 하며, 그것들은 삶의 모든 차원에서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방향을 취할 때만 생겨날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비생산적이라면 사랑에서도 생산적이지 못하다.
사랑의 기술에 대한 논의는 여기에 기술된 특징과 태도의 습득과 발전이라는 개인적인 영역에만 국한될 수 없다. 그것은 사회적인 영역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만일 사랑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 대해 사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라면, 사랑이 성격 특질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가족과 친구뿐 아니라 일이나 사무 혹은 직업에서 접촉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도 존재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사이의 ‘분업` 따위는 없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조건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에서
[논제 분석 및 출제의도 파악]
이근삼의 ‘원고지`라는 희곡에 신문을 읽는 장면이 나온다. 3년 전 신문이나 현재 신문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 현대 사회의 현상들이다. 그림 (가)에 제시된 현상도 반복되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들이다. 부유층의 병무비리가 터지고, 급기야 재벌기업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른바 ‘사회 지도층` 인사가 중심이 된 사건들이다. 일부의 잘못된 행동으로 선량한 지도층 인사들까지 매도될 수 있지만 국민들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일이다.
글 (나)에서는 교육을 받은 지도층들은 민중들에게 봉사할 성스런 의무가 있다고 피력하고 있다. 민중의 노동을 소비한 것이므로 돌려주는 것이 의무라는 것이다. (다)에서는 사랑의 기술을 실천하는 필수불가결한 태도는 사랑의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내적 활동이 있어야 하며,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 사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지도층들의 문제점은 그림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특권층 의식 문제까지 파악해서 해결방안을 진술할 수 있어야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나)와 (다)에서 제시된 추상적인 어휘들을 구체적인 방안으로 변용하여 활용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글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학생글]이예슬 충남여자고등학교 2학년
사회 지도층 ‘특권층`이 아닌 민중의 봉사자
▲ 이예슬 충남여자고등학교 2학년 |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현재 우리나라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서는 자신의 지위에 부합하는 사회적, 도덕적 의무감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림(가)에서는 바로 그러한 모습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의사협회장의 불법로비, 부유층 자녀들의 병무비리 심지어 재벌기업회장의 보복폭행 등.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지도층들의 비리는 자기 이익 챙기기에만 몰두하는 비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민들의 존경을 받아야 할 사회 지도층들이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의혹 때문이다.
글(나)를 보면 지도층은 수많은 민중들의 피와 땀을 대가로 그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은혜는 갚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도층들이 자신들을 ‘특권층`이라고 인식한다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도력의 발휘와 기술적 지식의 보급이 충분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사회에 환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나)로 미루어 보면 그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탐욕 때문이다. 자신이 민중들의 희생으로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알지만 특권을 더 누리려는 욕심 때문에 사회에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글(나)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는 정치가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가가 가져야할 태도는 무엇일까? 글(다)에서는 활동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생각하고, 느끼고, 게으름을 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글(다)에서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는 개인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영역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 전에 국민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실천은 사회 지도층이 국민들의 은혜에 대해 감사히 생각하고, 느끼며, 보답하려고 적극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이루어 질 수 있다.
이따금씩 일부 지도층들의 선행이 매스컴으로 선전되기도 한다. 하지만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사회 지도층의 의무는 국민들에게 봉사하고, 국가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림(가)처럼 국민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하는 행위가 계속된다면 국가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지도층 사람들이 ‘특권층`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국민에게 봉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위해서는 지도층은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국민에게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심사평]홍경옥 충남여자고등학교 교사
▲ 홍경옥 충남여자고등학교 교사 |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서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학생들도 교과서 외 시사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비리 원인과 현상과 해결책, 파급 효과 등 사회 현상을 교과서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학생은 다른 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서두에 제시함으로써 문제 해결의 방향을 암시하고 결론에서 사회 지도층이 지녀야 할 봉사 정신을 주장함으로써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도층 인사들의 비리 원인과 결과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고, 구체적인 해결 방안이 제시되지 못했다. 제시문의 범위에서만 논의를 전개하는 글은 순박하기는 하지만 심층적 논의와 창의적 발상에서 점수를 받기 어렵다. 논의를 전개할 때에는 항상 다각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는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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