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요즘은 어른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아이들의 목소리만 높아졌다. 나는 종종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출퇴근을 하고 있다. 지하철에는 각 칸마다 노인 임산부 아기엄마 환자 등 몸이 불편한 사람을 배려하기 위한 자리가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학생이나 젊은이가 버젓이 앉아있으면서 상노인이나 얘 엄마가 서있어도 양보하지 않고 앉아있는 모습이나 지하철이 자기 집 안방인양 젊은 남녀가 붙어 앉아서 자기 안방에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큰 소리로 떠들어도 어른들은 옳은 얘기를 잘못하면 젊은이들에게 봉변을 당할까 두려워 말하나 건네지 못하고 눈만 찌푸리며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사회는 산업화 정보화 시대를 거치며 핵가족화 되면서 집안이나 사회에서 어른들의 자리는 없어지고 버릇없는 아이들만 양산하여 사회의 질서가 땅에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나라에도 어른들의 목소리는 힘이 없다.
얼마 전 천주교 정진석 추기경이 납골당 문제가 시끄러워서 분쟁을 조정하기 위하여 서울 태릉성당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곳 주민들로부터 계란세례를 받았다는 신문보도를 본 적이 있다. 이 신문 보도를 접하고 어른을 이렇게 봉변을 주면서 자기들의 요구를 관철해야 하나? 결국은 본인들의 행동을 본 자식들에게 당할 것은 왜 모르는가? 개탄한 적이 있다.
요즘 우리사회의 모든 화두는 경제로 집약되어 있다. 도덕을 얘기하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현 우리사회의 자화상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이 잘못한 때는 혼내주고 가르쳐주며 따끔하게 잘못한다고 꼬집어주어야 하는 어른이 필요하다. 젊은이들이 무서워서 얘기를 못하는 사회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지 않았을까?
필자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올해로 탄신 400주년을 맞은 우암 선생과 같은 큰 어른(大老)이 그리워지곤 한다. 선생은 임금 앞이라도 옳은 일이면 목숨을 걸고 직언을 했다. 효종이 즉위하여 궁궐에서 궁녀와 상궁들과 노는 것을 보고 질책을 했다.
“전하가 오랑캐에 볼모로 가셨을 때 시정잡배들과 놀았다고 들었는데 이곳에서도 여자들과 상윷이나 하고 노니 이게 왕의 자품입니까?”라고 건의하자 그 말을 듣고 효종이 이후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하며, 아무리 지체가 높다 하더라도 제자가 와서 배우는 법이지 스승이 가서 가르치는 예가 없다고 하면서 대군사부시절에 강하는 자리에서 “세자와 대군들은 윗목으로 가서 앉으시오.”라고 질정하자 스승은 아랫목에 소현제자와 봉림대군 이하 제 대군들이 그때부터 윗목으로 앉는 것이 당연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선생의 수제자 권상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암 선생에게 배우기도 어렵지만 마땅히 배워야 할 점은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 원칙적이고 고집스럽다고 하는 점이다. 대개 남의 잘못을 보고도 바르게 말해주지 않는 것이야말로 온 세상의 풍조인데 이는 남을 거스르기만 하면서 자신에게는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은 그렇지 않다. 혹 약간의 심술에 잘못됨을 보이거나 속임수의 작태를 보여 의리를 해치는 것이 있으면, 평소 대단히 존경하고 친밀하게 지내는 자라도 부정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 말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어른의 역할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 가치관의 혼란시대에 정녕 선생과 같은 큰 어른이 그립고 생각나는 것은 무리한 생각일까?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