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태원 표준연 기반표준부 전자기그룹 책임연구원 |
갈색의 떡갈나무 잎들이 수북이 쌓인 길을 걸으면 머리가 가벼워진다.
이 길을 따라 오르면 전화로 전국 방방곡곡에 표준시각을 알리는 표준주파수국 안테나가 우뚝 서있는 넓은 잔디밭이 나온다.
크고 둥그런 잔디밭 가장자리에는 아름답게 변한 단풍나무들과 초록빛이 여전한 밤나무들이 둥그렇게 서 있다.
잎이 푸른 밤나무에서는 추석이 지나도록 알밤이 떨어진다.
이 무렵 초록빛 단풍나무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세상에는 온통 초록물결이 넘실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한달 조금 더 지나면 떨어진 밤송이들이 갈색으로 변하고 초록빛이던 단풍나무는 어느덧 가을분위기를 자아낸다.
문득 저 밤나무와 단풍나무를 누가 심었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연구원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그 나무들은 거기에 서 있으면서 오고가는 계절을 맞았다.
2년 전 이른 봄에는 적지 않은 수의 나무들이 폭설의 무게에 견디지 못하고 뿌리 채 뽑히기도 하고 굵은 가지들이 부러지기도 했다.
어떤 조직이 새로운 사람을 채용하는 일은 산에 심을 나무를 고르는 일에 비유할 수 있겠다.
고르고 고른 나무를 산의 어디에 심을 것인지, 어떤 영양분을 공급할 것인지, 어떤 방법으로 훈련시킬 것인지는 그 회사의 지도자가 정한다.
지도자는 산지의 형태와 조건에 맞게 다양한 종류의 나무를 심기도 하고, 때로는 쓰린 가슴을 안고 나무를 베어내기도 한다.
지도자는 그가 꿈꾸는 숲의 모습을 가슴에 품고 있으며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수십년 후의 장래모습을 생각하며 지도자는 나무를 고르고 또 심는다.
어떤 나무를 심을 것인가는 지도자의 가슴에 품은 장래모습 즉 비전에 의해 결정된다.
비전을 이루기 위한 길지도를 만들고 나서 이곳저곳에 단풍나무도 심고 밤나무도 심는다.
비전을 공유할 수 있다면 나무들은 각기 다른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지고 힘차게 성장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과학계나 교육계는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단풍나무 혹은 밤나무가 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과학계에서는 과학인용색인(SCI) 등재논문수가 상당한 규모의 연구비 투자 향방을 결정한다.
지난 11월 15일에 있은 수능시험 점수는 60만여명이나 되는 이 나라 젊은이들의 인생을 크게 좌우한다.
모두가 단풍나무 같이 되려 한다면 알밤을 생산하는 능력을 가진 밤나무 같은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두가 가을의 낭만만 읊조리고 있으면 먹을거리는 누가 만들 것인가?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밤나무이면서도 단풍나무 흉내를 내야 한다.
여기서 생기는 부작용은 일일이 열거할 필요조차 없다.
구성원들 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 평가잣대를 들이대는 비정상적인 경쟁사회를 벗어나 보려고 해외이민을 떠난다.
가슴에는 평생 나그네로 살겠다는 서글픔을 품고 말이다.
개인간의 지식습득의 속도와 실력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은 `붕어빵 교육`으로 교육의 품질은 낮아져서 높은 품질의 교육을 받아 보려고 사람들은 외국으로 떠난다.
내가 속한 과학계도 예외는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연구원들은 모두가 똑같은 단풍나무 같이 되기를 요구받고 있다.
연구결과물의 특성과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가 단풍나무로 간주되어 평가를 받아야만 한다.
그 평가잣대 중의 하나는 어떤 과학자가 생산한 SCI 논문수다.
이것이 객관적인 평가지수 중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평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크면 연구자들 간의 다양성과 차이를 간과할 수도 있다.
평생 18편의 논문을 썼다는 아인슈타인은 SCI논문수로만 본다면 국내 어느 대학에도 들어가기 어렵다고 개탄한 노학자의 외침을 귀담아 들을 일이다.
여러 분야에서 다면평가를 도입하는 것은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여기에 공정성과 투명성을 보장할 수만 있다면 국가의 인적 물적자원은 선순환을 이룬다.
이는 선진국의 문턱에 서 있는 우리나라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다.
가을에 단풍나무가 자아내는 낭만이나 밤나무가 가져다주는 풍요로움이 둘 다 공정하게 평가되고 인정받는 나라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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