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빈 유성고 교사 |
후자와 같은 평가는 일제의 선생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이 큰 역할을 하였으므로, 일제강점기에 선생의 정신이 어떻게 왜곡되었으며, 진실은 무엇인가를 파헤쳐 보고자 한다.
일제는 한반도를 식민 통치하면서 조선 독립 운동의 뿌리가 되는 민족정신을 말살하고자 했다. 우암 선생에 대한 왜곡은 이러한 정책의 하나인 것이다.
우선, 일제는 조선 왕조의 멸망 원인을 선생에게 돌렸다. 그들은 왕조의 멸망은 끊임없는 붕당 간의 싸움 때문이며, 그 싸움의 중심에 있던 노론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붕당정치를 부패와 사대의 상징으로 폄하하면서 우암을 당쟁을 이끄는 당파의 괴수로 묘사하였다.
또한, 각종 비갈의 ‘有名朝鮮(유명조선)`은 자주의식의 상징으로 배청(背淸)의 의미를 지닌 것인데도, 이를 명에 소속된 조선의 의미로 오도하여 사대의 상징으로 왜곡시켰다.
사실 배청 사상은 항일 사상과 맥이 통할 수 있는 조선의 자주 정신이기에, 위협을 느낀 일제와 친일파 등이 이를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위와 같은 일제의 우암 선생에 대한 왜곡은 이론적인 작업으로 끝나지 않고 우암과 관련된 문화재의 훼손으로 이어졌다.
우선, 화양서원은 전국 유림들의 강력한 반대 속에서도 1871년 3월 16일 훼철되어 강학의 건물들이 사라졌으며, 묘정비는 땅속에 묻히게 되었다.
만동묘 역시 1908년 훼철되고 그 재산은 일제에 귀속되었다. 이에 대하여 유림들은 ‘존화계`를 결성하여 비밀리에 제사를 올리는 등 명맥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1937년 관련 유림들이 구속되고, 위패와 제구는 불살라졌으며, 묘정비도 ‘明`자가 있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징으로 쪼아져 훼손되었다. 1942년에는 건물들이 불살라지고, 묘정비를 아예 땅에 묻어버렸으며, 1943년에 이르러서 만동묘는 완전히 철거되는 비운을 맞게 된 것이다.
1907년 9월에는 의병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어 화양동에 있는 환장암에 불을 질러 그 곳에 보관되어 있던 송자대전 판각 9073판과 운한각에 보관되어 있던 전적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우암 선생 관련 문화재를 훼손시킨 일제는 선생 옛 집 근처에 대전 신사를 세우고, 소제 고택과 3만여 평의 개나리 방죽은 김갑순에게 팔렸다. 이 과정에서 소제호는 매몰되어 흔적이 사라졌는데, 인위적으로 물길을 돌려 대동에서 소제동으로 이어지는 반듯한 대동천이 탄생되게 된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는 선생의 자존적 주체의식정신이 항일정신으로 이어지게 될 것을 우려하여, 선생을 철자한 사대주의자이며 당파주의자로 몰아 조선을 망하게 한 원흉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사실 우암 선생은 명대에서 끝난 성리학을 조선이 계승해야 한다는 ‘소중화(小中華)`를 주장하며 조선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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