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이 시인 추방론이 나온 경위다. 시인 추방론을 뒤집으면 오늘날 민주사회에서의 시인의 필요성을 반증해준다. 지구상에서 시인이 정치가나 행정가와 실제 한 몸이었던 실험국가가 과거 우리나라와 중국이다. 이런 전통에서 우러난 감수성과 활달한 상상력은 온갖 파리떼가 정치권에 들끓어도 망할 듯 망하지 않고 수백 년, 수수백 년 사직을 버티게 한 뒷심이기도 했다.
국내 자천타천의 시인을 늘려 잡으면 3만명을 헤아린다. 걱정할 일은 아니요, 시인보다 깡패와 창녀가 배출되는 것이 더 걱정이다. 시인들은 시를 왜 쓰느냐는, 존재론적 질문이기보다 돈 안 되는 일에 왜 매달리느냐는 힐문(詰問)을 자주 받는다. 그러기로 말하면 노래방에서 돈 내고 노래하는 행위나, 가령 내일(3일) 대전문인협회 주관으로 중도일보와 대전시낭송협회가 공동 주최하는 한밭시낭송 전국대회에나 다같이 적용되는 질문이다.
하지만 강권은 싫다. 다이어트 결심녀 앞에서 피자 먹기, 한약 먹는 남자 삼겹살집 데려가기, 또 활자만 보면 머리가 어질한 사람에게 시 권하기는 모두 놀부전(傳) 실천 행위다. 그래도 읽는 게 낫고, 일상과 동떨어진 만큼 일상탈출에 다시없는 특효약이다.
어렵지도 않다. 자신에게 맞는 시를 가볍게 읽고 어쩌다 시인의 마음을 품으면 그건 보너스다. 말 꺼낸 김에 도전 500수나 1000수 시 암송대회와 급수별 시 낭송 검정시험이 치러지도록 여력 있는 누가 나선다면 좋겠다. 자아와 본성에 깨어 있는 시간은 고대 아테네 시민보다 바쁜 현대인에게 더 긴요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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