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출근시간이라 사람이 적지 않은 상태였는데, 넓은 객차 안이 한 사람의 호통으로 조용해졌다. 한 20세 남짓한 청년 하나가 경로석에 앉았다가 노인 한분에게 치도곤을 당하는 광경이었다. 경로석에 젊은 놈이 앉았으니 노인장은 화도 날만 했다.
그러나 사실 요즈음 대부분의 노인분들은 세상 변함이 아주 못마땅하지만, 그래도 혼자 화를 삭이면서 점잖게 계시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이 분은 결코 만만한 분이 아니었다. 곁에 서 있는 청년에게 노인은 화를 내다가, 경로우대증과 무슨 증명서까지 보이면서 핀잔을 계속하였고, 결코 쉽게 수그러들 기색이 아니었다.
좀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상황에서 잠시 생각해 보자. 정말 못돼먹은 자들은 곧바로 노인에게 대어 들 수도 있다. 아니면, 위아래를 훑어보고 비아냥거리면서 옆 칸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청년이 바로 곁에서 그 치도곤을 몽조리 당하고 있었고, 연신 노인에게 “못 봤다니께유”를 연발하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보았다면 자기는 분명히 일어날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었고, 그것을 몰라주는 것에 대하여 계속 변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분명 촌놈이었고, 아닌 말로 세상 물정을 모르고 착하게만 생긴 고향동네 동생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렇다. 그 청년은 요즈음의 경쟁사회에서 분명히 별 볼일 없는 행색을 한, 그리고 처세나 경쟁에 뒤떨어진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하여 보았다.
내가 만약 사장이라면 저런 사람을 구해 사원으로 채용하겠다고. 그리고 저런 마음과 생활태도를 가진 제자를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지금에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결코 없다. 촌놈이 그렇게 나쁜가? 촌놈이면 세상에서 대우도 못 받고, 또 그렇게 경쟁력도 없을까? 하기야 세상이 그렇다면 나는 할말이 없지만, 나는 적어도 스스로가 그런 마음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고향이 있고, 부모가 있고, 또 모교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저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기가 태어난 고향이나 자기를 낳아 길러주신 부모를 고마워하고 지성으로 섬겨야 정상이다.
물론 살다가 보면, 그리고 마음이 어리면 때로 서운한 마음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그러다가도 제정신이 돌아오면 그리워지는 것이 고향이고, 부모 품에 안기고 싶어야 제대로 된 사람이다. 설령 고향마을이 가난으로 찌든 모습이어도 그렇고, 또 나의 부모가 못 배우고 잘 나지도 않으며, 늙어 병색이 있어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시골 모교를 부끄러워하고, 고향동네를 창피해 하는 사람치고 잘되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아마 자기 부모가 못 배우고, 가난하고 힘이 없다고 무시하거나, 창피해 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면 그 세상은 분명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일 것이라고.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추호의 변함이 없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고, 대학도 지방대학인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나 지금껏 그것 때문에 창피하다거나, 그것이 인생살이에 장애가 된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 정감어린 시골의 정서가 나의 문화감성을 살찌워 오히려 장점이고, 그래서 시골 태생임을 과시할 때도 많다.
공주대학교가 요즘 교명을 바꾸겠다고 난리도 아니다. 작은 지방 명칭이 문제라는 것이고, 이름 때문에 발전이 안 된다고도 한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공주의 이름만 떼면 좋다고도 한다는 지경에 이르면, 그리고 그들이 공주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교수들이라는 점이 더욱 우울하다.
이제는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나서서 어린애 장난 같은 사태를 막아야 할 것같다. 혹 충남대 교수들이나 대전대 교수님들 중에서도 세계적 이름으로 대학 명을 바꾸자거나, 바꾸면 발전할 것으로 믿는 분이 있을까? 명칭이 문제가 아니라, 대학을 발전시키려는 노력과 의식이 중요하다. 기발하고 적극적 대안을 그것도 열심히 모색해도 부족한 이 시기에 분란과 미래도 보장되지 않은 촌놈 무시 타령은 아무래도 수긍할 수가 없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