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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용봉봉래산향로(백제대향로)는 부여 능산리 고분 주차장을 조성하면서 혹시나 해서 팠다가 찾아냈다. 발굴 직후, 메이드 인 수(隋)나라냐 백제냐로 의견이 갈렸는데, 백제산으로 가닥을 잡은 단서 한 가지는 뚜껑 안쪽에 무심히 뚫은 듯한, 백제인 솜씨로 추정되는 구멍이었다.
깨진 유물, 사소한 유적도 이렇듯 가치 있다. 의자왕의 삼천궁녀는 백제 멸망 시점의 수도 부여 인구 5만에 견줘 (그 물증이 언젠가 나오리라 믿지만) 과장된 숫자다. 부여 규암면 왕흥사터에서 지금 출토되어 세상을 흥분시킨 백제 사리기로 예를 들어도 뚜껑 손잡이 하나가 중국 남북조나 일본과의 교류를 대변하는 타임머신이다.
▲ 무령왕릉 진묘수 모형 |
필자는 그래서 더욱 청자나 백자는 장식용이면서 생활용품으로 쓰였다는 확신을 갖는다. 심증은 예의 주꾸미가 찾은 보물선의 목간(木簡) 기록을 보고 굳어졌다. 나무에 글씨를 쓴 고려적의 이 택배 물표에서 당진에서 개성 최대경 댁으로 보낸다든지 ○안영이네 집에 도자기 한 꾸러미 부친다든지 하는 기록을 찾았다. 지난날의 도자기 대중화를 시사한 바코드인 것이다.
얼마 전 어느 도공이 청자 사발에 밥 말아먹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한다는 미식가도 보았다. 일본과 중국, 프랑스에서 자기 대중화를 이뤘고 우리도 항아리나 필통으로 쓰인 전거에 비추면 괜히 차 치고 포 치는 게 아니다. 비 갠 하늘빛 청자에 밥 말아먹고 싶은 나 개인의 열망은 전통의 현대화에 대한 강조이니 책잡힐 건 없다.
자, 서해의 수중 바코드처럼, 백마강변의 사리기는 『삼국사기』기록까지 갈아엎으며 역사를 새로 쓰게 한다. 거기 적힌 몇몇 글줄에 한.중.일 삼국 외교사의 코드가 담겼으니 겹경사다. 사리기 발굴몽은 미처 모르거니와 문화재청이 꿈 하나는 야무지게 꾼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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