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여 주고 재워 주었다. 하루에 5 달러의 용돈까지 주었다.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온 동료들은 환호했다. 쓸 일은 없었다. 한 달 모으면 월급의 서너 배가 된다 했다. 한밤중에도 불 꺼지지 않는 상가의 쇼윈도가 현란했다. 기차나 지하철은 개찰과 열차 안 검표와 출찰이 없었다. 그냥 타고 내렸다. 표를 기념으로 가져왔다. 신뢰사회였다.
어느 날 저녁식사가 한 시간 앞당겨졌다. 1882년 창단의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연주여행에서 돌아왔다. 몇 년 만에 홈에서 연주회를 한다. 식당 종업원들이 거기에 간다 했다.
활력 있는 거리와 잘사는 사람은 부러웠다.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 하나가 떠나지 않았다. 화두처럼 달라붙었다. 장벽 저편 동독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동베를린을 조망하는 관광전망대에 올라섰다. 군인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가 두꺼운 외투를 입고 유모차를 끌고 있었다. 젊은 남녀가 손잡고 걷고 있었다. 사람이 같았다. 공산주의자는 빨갱이라 했었다. 그래서 우리하고는 좀 다르려니 했다. 못 먹어서 비쩍 말랐으려니 했다. 옷도 허름하고 기워서 입으려니 했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서와 동이 다른 점은 있었다. 서쪽은 활기찼다. 사람이 많았다. 동족은 그렇지 않았다. 차이라면 그 정도였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하는 의문이 자리 잡았다. 도서관 탐색을 했다.
용케 마침 영어판 여행 안내서를 찾았다. 대동강 변 아파트 단지에 놀랐다. 제3국에서 비밀리에 분해하여 수입했다던 소문이 있었던 경운기도 보았다. 마음 저 편에 깊이 묻었다. 말해서는 안 되는 시대였다. 혼자 가슴 두근거리며 지냈다. 정작 일은 이후 터졌다. 동독 관광이 있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다 갔다. 사우스 코리아에서 온 나만 안 된다 했다. 그쪽으로는 찰리 포인트를 통해서 갔다. 미군 관할이었다. 신변안전보장이 안 된다 했다. 젊은 사무관에게 가난은 부끄럽지 않았었다. 분단국가 태생이라는 서러운 처지를 곱씹었다.
그로부터 12년. 1990년 여름에 다시 갔다. 동서를 가로 지르던 장벽이 무너진 후였다. 거리도 대학도 이쪽저쪽이 동일했다. 그렇다면 나의 북쪽은 어떨까 하는 생각만 앞섰다.
1984년 교토에 갔다. 마침 세계고분전이 열리고 있었다. 북한 우표도 팔았다. 사고 싶었다. 한복으로 감싼 조총련 젊은 여성이 고왔다. 그래도 겁이 났다. 납치될 까 봐. 10년 후 도쿄에 갔다. 조총련 사람이 경영하는 불고기 집을 스스럼없이 드나들었다. 그렇지 같은 조상 둔 사람들이잖아. 강산변하는 연륜이라더니 과연 그렇구나. 감회가 깊었다.
통일은 지상염원이다. 오래 걸리고 험난한 여정이다. 독일이 둘에서 하나가 되는 데 몇 년 걸렸는가. 45년이 필요했다. 분단된 다음 25년 만인 1970년에야 양국 정상이 처음 만났다. 서독은 동독과 합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다 한다. 우리는 어떨까. 투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본래 하나인 둘이 하나 되기 위해서 불가피하다. 아끼면 그 만큼 더뎌지고 만다. 남북한 정상회담에도 돈이 든다. 그래도 해야 한다. 2000년에 했다. 7년 지나서도 했다. 정략이라 할 일 아니다. 기회 있을 때 바로 만나야 한다. 금강산 구경보다 평양사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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