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밖]변신은 무죄, 무제도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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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 밖]변신은 무죄, 무제도 무죄

  • 승인 2007-10-18 00:00
  • 신문게재 2007-10-19 21면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베토벤의 ‘운명’과 ‘비창’, 요조숙녀가 나오는 시경 ‘관저편(關雎篇)’도 후대에 붙인 별명이다. ‘무제’라면 어떨까? 그렇게 써서 제목이 근사한 명제로 화하는 행운을 건진다면. 단, 영어 ‘untitled’에 권리 없음의 뜻도 있으니 조심!


가을이면 미술관과 화랑들이 활기를 띠어 눈이 즐겁다. 지하상가에 가면 꼭 미니스커트 여성과 조우하듯이, 전시회에서 어지간하면 마주치는 제목이 있다. ‘무제(無題)`. 지난 세기에 이어 금세기에 가장 빈번한 이름, 제목은 있되 제목이 없다는, 인색하고 반어적인, 이름 없는 이름이다.

생각을 절약하기 위해 기성복을 껴입는다는 말이 있다. 일일이 판단이 번거로우면 만들어져 있는 언어라는 옷을 입는다. 형형색색을 구분하기 피곤해서 뭉뚱그려 단풍이라 부른다. 그러다 사물을 정통으로 잘못 보고는 한다. 이럴 때, ‘무제`는 편하고 고맙다.

이때를 위해 사르트르는 ‘무`는 ‘존재`의 반대가 아니며 존재에서 무가 나온다는 역설을 예비해 뒀다. 대중들이 제일 싫어하는 제목이기도 한 ‘무제`는 보는 이의 생각의 크기에 맞추는 맞춤옷이다. 언타이틀드나 노네임은 기성복이 아닌 고로 당당히 존재의 통로를 거쳐 나왔다.

회사 부근에서 열린 접사회전에 가니 메마른 나리꽃을 진딧물들이 잔뜩 빨고 있는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직접 찍은 신용범 회장이 안내하며 “퇴직 후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다”고 부연한다. ‘나리와 진딧물`보다 ‘무제`처럼 함축적이고 포괄적인 이름표를 달았으면 감상자의 해석은 달라졌을 작품이다.

▲ 이중열 작 ‘무제’ (필자 소장)
▲ 이중열 작 ‘무제’ (필자 소장)
제목이 안 붙으면 얽매임 없이 자신만의 화두에 매달려 좋고, 작가를 만나면 정색하고 말을 틀 구실로도 좋다. 솔직히 3억9000만 원에 낙찰된 김환기의 ‘무제`를 보면 잡념[돈 생각]이 생긴다. 신정아씨가 청와대가 임대한 500만 원짜리 ‘무제`에서는 권력 무상의 비애가 아른거린다.

또 괘씸할 때는, 제목 달기 귀찮아 공허한 정신세계로 썼을 때에 한해서다. 송나라 육유도 그래서 당나라 시 ‘무제`를 “술자리에서의 방탕한 말로 꼭 꼬집어 말하기 어려우니까 무제”라며 헐뜯었을 터다. 이치가 아닌 그저 외형을 무제로 우기며 감상자의 교감을 외면하는 게으름은 그러나 얄밉다.

물론 사랑 없는 사랑, 환상 아닌 환상을 말하는 사이비에 비해 그 편이 정직하다. 작품명이 없어 책에 삽화로 쓰려고 작가에게 물으니 “언어감각, 예술감각, 뉴스감각을 갖춘”(순전히 화가의 빈말) 나를 지목한다. 멈칫거리다가 무제라 할까요? 했더니 선뜻, 그러시죠, 해서 ‘무제`로 남은 것이 있다.

인생이 늙은 오이 맛이 나거든 낙담하지 말고 ‘무제`라 칭하고 한없는 자유를 얻자. 모자라면 무제 2, 무제 3으로 거듭 분화하면 그만이지 주눅 들 일 없다. 무제 앞에서 더 오래오래 발길이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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