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절약하기 위해 기성복을 껴입는다는 말이 있다. 일일이 판단이 번거로우면 만들어져 있는 언어라는 옷을 입는다. 형형색색을 구분하기 피곤해서 뭉뚱그려 단풍이라 부른다. 그러다 사물을 정통으로 잘못 보고는 한다. 이럴 때, ‘무제`는 편하고 고맙다.
이때를 위해 사르트르는 ‘무`는 ‘존재`의 반대가 아니며 존재에서 무가 나온다는 역설을 예비해 뒀다. 대중들이 제일 싫어하는 제목이기도 한 ‘무제`는 보는 이의 생각의 크기에 맞추는 맞춤옷이다. 언타이틀드나 노네임은 기성복이 아닌 고로 당당히 존재의 통로를 거쳐 나왔다.
회사 부근에서 열린 접사회전에 가니 메마른 나리꽃을 진딧물들이 잔뜩 빨고 있는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직접 찍은 신용범 회장이 안내하며 “퇴직 후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다”고 부연한다. ‘나리와 진딧물`보다 ‘무제`처럼 함축적이고 포괄적인 이름표를 달았으면 감상자의 해석은 달라졌을 작품이다.
▲ 이중열 작 ‘무제’ (필자 소장) |
또 괘씸할 때는, 제목 달기 귀찮아 공허한 정신세계로 썼을 때에 한해서다. 송나라 육유도 그래서 당나라 시 ‘무제`를 “술자리에서의 방탕한 말로 꼭 꼬집어 말하기 어려우니까 무제”라며 헐뜯었을 터다. 이치가 아닌 그저 외형을 무제로 우기며 감상자의 교감을 외면하는 게으름은 그러나 얄밉다.
물론 사랑 없는 사랑, 환상 아닌 환상을 말하는 사이비에 비해 그 편이 정직하다. 작품명이 없어 책에 삽화로 쓰려고 작가에게 물으니 “언어감각, 예술감각, 뉴스감각을 갖춘”(순전히 화가의 빈말) 나를 지목한다. 멈칫거리다가 무제라 할까요? 했더니 선뜻, 그러시죠, 해서 ‘무제`로 남은 것이 있다.
인생이 늙은 오이 맛이 나거든 낙담하지 말고 ‘무제`라 칭하고 한없는 자유를 얻자. 모자라면 무제 2, 무제 3으로 거듭 분화하면 그만이지 주눅 들 일 없다. 무제 앞에서 더 오래오래 발길이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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