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사회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지식인들의 책임도 작지 않다. 사회가 총체적 혼란에 빠져들었을 때 적극적으로 그 수습에 나서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정파를 초월한 대안 만들기에 참여해야 할 사람들은 당연히 양식을 잃지 않고 있는 이 땅의 지식인들이다. 한국 사회의 2차적 비극은 지식인들의 이러한 당위적 역할을 포기한 때문이 기도 하다. 요즘 심란하게 불어오는 ‘선거바람’ 앞에 여기저기에서 특정인에 대한 지지 성명이 줄을 잇고 있다. 영리한 교수들의 이름도 심심찮게 오르내린다. 일을 도모하기 위해 지식인들이 선택한 방법 치고는 너무 소란스러워 보인다.
민주 정치에 있어서 권력이란 필연적으로 모순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기본 철학은 대표를 뽑아 힘을 모아주려는 욕망과 모순된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하지만 그 여론에 따라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은 곧잘 49:51의 싸움으로 전락하는 선거의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정치현실에서도 여실히 보여주듯 49의 투표 행태도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거는 ‘나의 믿음만이 진리’라는 유권자의 확신을 만족시켜 줄 만한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나의 선택’이 모쪼록 49가 아닌 51의 편에 들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이 선거의 계절을 맞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 소란스런 쟁투의 심판자 역할이 특별히 중요해진다. 그 선두에 이른바 신문, 방송이라는 매스미디어가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언론이 그 역할을 수행할 만한 건강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아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특히 거대 언론매체들이 보이고 있는 아전인수의 보도 행태는 도가 지나쳐서 대부분의 사회적 갈등의 진원지 역할을 하고 있다. 국민의 이름을 빌려 여론몰이 식으로 이 선거 정국에 개입한다면 우리 사회는 다시 한번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원치 않는 퇴행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현실 정치인은 물론이고 언론, 그리고 교수사회를 포함한 지식인들이 너무 쉽게 자신의 확신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 언론은 여론이나 민심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끌어들이는 데 좀 더 신중해야 할 것이다. 결국은 제 고집에 불과한 논리를 일반화하기 위해 국민의 이름을 너무 쉽게 동원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사회는 이미 세계가 인정할 만한 정치적 성취를 이루어낸 것도 사실이다. 이 엄연한 현실을 왜곡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고작 정파의 이익이라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많은 국민들이 다가오는 선거에 그 어느 때보다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물론 주체적 책임감으로부터 오는 부담이라면 회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공허한 공약, 일방적인 비방은 물론이요 언론의 지나친 개입, 지식 사회의 성명전 등은 이 부담을 부자연스런 것으로 퇴색시키고 있다. 선거 이후에도 현실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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