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이야기 하듯 닭은 사람과 가장 가까웠던 가축이고, 하루가 새롭게 열리는 새벽을 알리는 특별한 역할을 담당한다. 용은 예로부터 상상의 상서로운 동물이며, 그런 때문에 왕과 같은 지극히 높은 자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렇게 볼 때 계룡산은 새벽을 먼저 알리는 선지자적 상징성, 그리고 고귀함을 나타내는 지극히 특별한 의미를 그 이름에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영험한 산으로 전국의 무속인들이 찾는 산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신원사 골짜기는 사찰 배치구조와 약간 동떨어진 중악단을 포함하여, 무속적인 당굿 판의 다양한 모습들에서 사뭇 불교와는 다른 무속적·민간신앙적 풍모가 느껴진다. 이는 국가가 주요 명산에 지내던 제사유적의 오랜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계룡산은 백제 지역에서 차지하는 막중한 비중 때문에 신라의 삼국통일 후 오악 중 서악(西岳)으로 편성되어 국가가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그러한 제사는 계속 이어져 왔다. 지금의 신원사는 절 이름을 ‘신원사(新元寺)`로 부르지만, 원래는 “신원(神院)”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계룡산은 조선 건국 후 이 태조가 계룡산 공주 신도안에 도읍을 옮기려고 하였다는 것이나, 정도령의 후천 개벽을 믿는 ‘정감록`으로도 이어져 이후 도참과 민간신앙의 주요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와 함께 계룡산 일대에는 많은 일화와 전설들이 전해온다. 특히 계룡산신에게 제사를 올렸던 신원사 골짜기도 그런 곳의 하나이다. 예컨대 백제멸망 당시의 전설로 고왕암과 마명암 이야기, 왕의 무덤이라고 하여 붙여진 능산이라는 지명, 이태조 기도굴, 압정사(壓鄭寺) 전설이 바로 그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660년 부여성이 함락되자 의자왕은 좌우 근신을 데리고 밤에 도망하여 웅진성(공주)으로 피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원사 골짜기의 고왕암(古王庵)은 당시 의자왕과 왕자 융이 나·당연합군을 피하다가 항복한 곳이라고 하고, 이 암자의 곁에 있는 마명암(馬鳴巖)은 왕자 융이 신라군에 잡혀가게 되자 왕자의 말이 이곳에서 크게 울다가 죽었던 곳이라고 전한다.
능산은 신도안에 도읍이 되면 첫 왕의 능터가 될 곳이라며, 사연봉에 있는 이태조 기도굴은 이 태조가 이곳에서 계룡산신에게 기도를 드렸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또 등운암(騰雲庵)은 이 태조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암자는 후일 계룡산의 정씨의 왕기를 누른다는 뜻으로 압정사(壓鄭寺)라 고쳤다고 한다.
이러한 신원사 골짜기는 고종과 명성왕후에 의하여 다시 한번 주목되었다. 명성왕후는 이곳에 와서 빌어 왕자를 낳게 되었다 하며, 1879년(고종 16) 신원사를 새로운 제국의 신기원을 연다는 의미에서 ‘신원사(新元寺)`로 개명하고. 고종은 이듬해 계룡신사의 격을 올려 중악단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때에 중악단의 건물도 경복궁을 건축하던 대목들을 동원하여 그 위엄과 건축 기법이 돋보이게 되었다. 신원사 중악단이 보물로 지정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연 때문이다.
물론 중악단과 신원사가 반드시 대한제국의 성립과 관계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는 계룡산의 영험스러움을 기원하던 오랜 전통이 대한 다시 한번 국가적으로 재현된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러한 기대와 신성성에 의지하는 인간의 믿음은, 앞으로도 여러 형태와 모습으로 계속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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