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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이중성의 가면을 쓰고 가면 쓴 타인을 보고 사는 게 숙명일지 모른다. ‘탈`이나 ‘마스크`나 맨 얼굴을 감추고 가장하는 것이다. 근원적인 욕망인 ‘리비도`조차 ‘수퍼에고(초자아)`의 가면에 가려진다. 그런 골치 아픈 것 집어던진 인간이 있긴 있다. 양비귀의 목욕 장면에 혹해 친자식 귀양보내고 며느리를 독차지한 현종도 그 부류다. 그곳 화청지 자리에 만든 양귀비탕에 관광객들이 환호작약하며 뛰노는 모습을 보며 실소를 머금는다.
현실의 우리는 현종처럼 즉흥적이고 화끈해질 수가 없다. 통제가 잘 안 되면 가면을 쓰고라도 억누를 게 있다. 말 또한 그렇다. 재수 없으려면 ‘어젯밤 뭐했냐?` 물었다가 송사에 휘말릴 각오를 해야 한다. “여자는 회처럼 신선해야… 오래되면 질려… 버려뒀더니 삭아서 맛있는 홍어회…” 운운으로 가수 윤종신이 뭇매를 맞았다. 다소간 가면을 벗고 약간의 변태가 용서(?)되는 룸살롱과 스튜디오는 또 다르다.
이명박 대통령 후보도 ‘마사지걸 고르는 법`으로 곤욕을 치른다. “고참 직원은 마사지걸 중 가장 얼굴이 예쁘지 않은 여자를 고르더라.” 덧붙는 인생의 지혜. “예쁜 여자는 이미 많은 손님들을 받았겠지만 예쁘지 않은 여자들은 선택이 고마워 성심성의껏 서비스….”
이 후보는 “예전 관찰사였다면 관기(官妓)라도 하나 넣어드렸을 텐데”라는 정우택 충북지사의 청주 조크에 “어제 온 게 정 지사가 보낸 거 아니었냐?”고 응수했다가 설화(舌禍)를 자초하기도 했다. 말의 씀(話用)을 ‘지향성`으로 보는 존 설 같은 학자에 따르건대 그 말씀이 농담이냐 진의냐가 전부는 아니다. 습관, 자질, 성향이 나타나는 의도적인 사유방식이 말(언어)이다.
하루아침에 ‘궁중용어`로 바꾸라는 뜻은 아니지만 의심받지 않으려면 홍시를 보고 모른 체할 때가 있고 홍시에서 홍시 맛이 나도 함구해야 할 때가 있다. 어려워졌다면 한 번 더 장금이 버전으로 끝내는 수밖에 없다. “예? 저는… 제 입에서는… 고기를 씹을 때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고 생각했으냐 하시면…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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