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평민 생활상 재현 공사도 한창
돌무덤 ‘어버’ 세바퀴 돌며 무사 기원
아직도 건재한 몽골 샤먼 영향력 실감
동서냉전이 끝난 후 지형이 바뀐 세계정치의 성격을 규명하려는 의도로 1993년 여름 「Foreign Affairs」지에 ‘문명의 충돌`이라는 논문을 써 일약 유명해진 미국의 정치학자 「새무얼 헌팅톤」은 이 논문에서 “인류사는 문명사며 인류의 발전을 문명아닌 다른 용어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헌팅톤은 문명은 뚜렷한 경계선이 없으며 문명들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긋기 어렵지만 아무튼 모종의 경계선은 또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표현을 했다. 이 인류사가 문명사란 지적에 필자는 공감한다.
또 그간의 인류가 쌓아온 문명들 사이에 확연한 차이는 없으나 그래도 다소의 상이점은 있다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의 국력이 신장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외국을 나가게 되는데 다른 나라에 가면 그곳의 문화와 문명과 만나게 되고 사람사는 모습은 거기서 거기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면서도 각기 다른 모습의 삶의 방식과 생각에 접하게 된다.
▲ 몽골의 전성기인 13세기를 재현한 13세기 민속촌. |
일주일의 짧은 기간동안 그것도 울란바트르주변에 한정되는 여행이었지만 필자는 옛 대제국치고는 너무도 유적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13세기에 세계사에서 가장 강대한 제국을 형성했던 나라치고는 유적이 별로 없었다.
우리의 경우 전국 곳곳이 옛 유적이 있어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지 않는가. 물론 몽골도 과거 몽골제국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발굴작업이 세계 도처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과거 로마나 고대이집트 또는 잉카를 떠올렸던 필자에게 몽골의 유적은 눈에 띠지 않았다.
실제로 옛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하라호름(Karakorum)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큰 쇠솥 한 개와 불교사원, 무덤, 왕의 집무실건물 세 동뿐이라고 한다. (신현덕지음. 몽골2005.) 넓은 벌판 한가운데 남아있는 옛 성곽만이 수도였음을 알려주는 흔적이라는 것이다. 울란바트르에서 자동차로 몇 시간을 달려 하루를 묵었던 곳에 있었던 만조시르사원 역시 황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730년대 사찰이었던 이곳은 2천명이 넘는 승려가 불도를 닦던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대단히 큰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937년경 폐쇄된 뒤 남아있는 것은 큰솥과 야산중턱에 서 있는 사찰 그리고 절터였음을 말해주는 돌무더기가 전부였다. 야산에 우거져 있는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과 한여름의 태양 아래서 옛 사원의 영화를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었다. 옛 몽골제국의 영화는 그저 박물관속의 박제된 의상과 티셔츠에 그려진 칭기스칸과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Kublai Khan:1216-94)의 모습이 전부인가하는 쓸쓸함이 밀려왔다.
▲ 2000명이 넘는 승려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만조시르사원 터 모습. |
필자의 이같은 허탈감을 공감했는지 울란바트르 근교에 「13세기 민속촌」(13th Century National Park)이 건설되고 있었다. 우선 이곳에 들어가는 초입부터 외래인의 눈길을 붙잡았다. 초대형 칭기스칸동상이 세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넓은 초원의 한 가운데 건물3?4층 높이에 해당하는 대형동상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비로소 칭기스칸의 위용이 느껴지는듯 싶었다. 역시 사람은 말보다 무엇을 직접 보고 느껴야 하는 감성적 존재인가 보다. 이 13세기 민속촌은 몽골의 사업가이자 실력자가 구상해 건립중이라고 한다. 13세기야말로 몽골의 최전성기로 몽골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입장료가 비싸 정작 몽골인들은 이곳에 들어오기 어렵다. 한참 공사가 진행중인 13세기민속촌은 우선 그 크기가 너무도 컸다. 시설물들사이로 이동하기 위해서 차를 타야만 했다.
13세기 융성했던 몽골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의도로 건설중인 이 민속촌에는 왕이 묵었던 겔을 비롯해 그의 부하들이 묵었던 겔 그리고 일반평민이 살았던 당시의 생활모습, 또 몽골인의 교육시설, 사냥터 등 13세기 몽골제국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시설물중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몽골샤만의 집이었다. 입구에는 잡신을 물리치려는, 끝을 뾰족하게 깎은 나무들이 세워진 한 가운데 신이 들어온다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그 앞에 재단이 있었다. 우리의 토착신앙이 무속이듯이 몽골인에게 무당은 아직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몽골초원에서는 곳곳에 ‘어버`라는 우리네 성황당이 있다.
▲ 몽골초원 곳곳에 있는 돌무덤 ‘어버’. |
일종의 돌무덤인데 초원어디를 가나이 돌무덤이 있고 깃대에 파란 천이 묶여져 있다. 여행길에 몽골사람들은 이 곳에 찾아 세바퀴씩 돌고 무사하기 기원한다. 어쨌든 한참 공사중인 이 13세기민속촌은 몽골의 전성기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장소로 꾸며지기를 바란다. 일본에 명치시대를 재현한 메이지무라가 있고 우리에게 용인민속촌이 있듯이 몽골의 이 13세기민속촌이 앞으로 세계 많은 나라의 사람들에게 몽골의 옛 영화나 문화를 체험케 해 주는 장소로 자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몽골의 경제는 아직 열악하지만 드넓은 대지와 과거 대제국의 위용을 지녔던 나라다. 인류문명사에 기록을 남겼던 과거가 있는 나라인 것이다. 아직 세계 곳곳에 분열과 대립으로 인류의 불행이 계속되는 모습을 보면서 칭기스칸의 지도력이 21세기에 어떤 신통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까하는 공상(空想)을 하면서 13세기민속촌을 뒤로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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