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쳐먹는 강의를 들으며 그러나 제아무리 영어라도 한국어의 무궁무진한 동사의 쓰임새에는 ‘새발의 피’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다 헤아리지는 못했지만, ‘먹다’ 한 가지 갖고도 수천, 수만의 말을 생산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영어에도 ‘배고파 죽겠다’등의 표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우리처럼 거의 모든 층위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유효하지는 않다.
실제 입으로 무엇을 먹는다는 중심 뜻에 아주 다양한 변두리 뜻을 거느리고 있다. 왕년에 홍수환이 세계 권투의 왕좌에 오른 직후 그의 어머니와 나눈 국제전화 첫마디가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였다. 화장품이 얼굴에 잘 안 발리면 화장발 걱정하는 여성들은 화장이 잘 안 먹는다 푸념하고, 오늘같이 끄무레한 날씨엔 먹이 잘 안 먹는다고 붓을 내려놓는 화가도 있다.
웬만한 모든 명사는 ‘먹는다’에 능히 귀속된다. ‘뜯어서 먹는’ 영어단어집까지 나왔다. 책을 씹어먹다시피 읽는 것도 맛이다. 욕먹고, 돈을 먹고, 술도 나이도 먹고, 더워서 더위먹고, 산다는 것의 불확실성에 지레 겁먹는다. 아프리카 스와힐리어로 ‘사랑한다’가 ‘먹는다’는 말뜻도 된다. 좋지 않은 우리 은어를 헤아리며 말의 한없는 오지랖을 재확인한다.
빌어먹든 벌어먹든 얻어먹든 붙어먹든 사는 것은 먹는 것이고 입맛이 살맛이다. 밥 먹었느냐는 여전히 인사의 단골 메뉴로 밥 먹듯 행해진다.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는 양반 자존심도 음식 앞에서 봄눈 녹듯 허물어진다. 날이 산득산득 들면 톱날 잘 먹는 것, 블렌더(믹서)의 등장으로 사라진 맷돌에 콩이 잘 갈려도 잘 먹는 것이었다. 농사짓는 논배미가 쌀 석 섬을 먹으면 그만큼의 수확을 한다는 의미다. 남의 돈을 해먹고 등쳐먹는 사람 때문에 울먹이거나 골탕먹는 사람도 있다.
구워 먹고 삶아 먹고 볶아 먹고, 이제 골라 먹는 재미로 관심 이동하면서 동사의 팽창은 진행 중이다. 잘 먹자는 분위기에 편승, 웰빙음식이 유행하지만 먹는 일의 비중은 줄어들 기미가 없다. 올 가을에는 말도 잘 먹히고 글도 잘 먹히기를 소망한다. 마음먹기 나름으로 무엇이건 먹는 우린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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