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런 세 가지 유형의 교수 분류법으로는 현재 대학의 실상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네 번째 유형의 교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시간강사 교수’이다. 시간강사면 시간강사, 교수면 교수지 어정쩡하게 ‘시간강사 교수’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러나 시간강사도 엄연한 ‘교수’이다. 신문이나 방송의 사회면에 실린 기사를 한번 살펴보자.
실적 부풀리기에 신이난 수사기관은 비리 혐의자를 발표할 때 그가 대학의 시간강사라는 사실을 알고도 ‘교수’라고 딱지를 붙이고 선정적이길 좋아하는 언론은 한술 더 떠 시간강사를 ‘비리 교수님’으로 큰 제목을 뽑아 매도한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권력체인 공권력과 언론기관이 시간강사들을 교수라고 대우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필자가 시간강사를 교수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앞의 세 가지 교수 유형은 가르치는 사람의 지위를 기준으로 분류한 경우이다. 공급자 중심의 관점과 기준에 의하면 시간강사는 분명히 교수라고 불리기 민망하다. 그러나 강의실과 실험실에서 강의를 듣고 배우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교수는 두 가지 유형, 즉 전임교수건 시간강사건 학생들을 존중하고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교수와 그렇지 않은 교수로 나뉠 뿐이다.
일부 영악한 학생들이 전임 교수와 시간강사를 또박또박 구분해서 아양을 떠는 예가 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있어서 시간강사라는 지위는 좋은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는데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성에 젖고 권위적이어서 학생을 배려하지 않거나 새로운 지식정보에 둔감한 교수들 보다 현장의 경험이 풍부하고 열의를 가진, 새로운 지식과 정보로 무장한 시간강사들의 강의가 훨씬 유익하고 실질적이라는 평가도 많다.
실제 대학의 강의 분담 역시 시간강사들에 의해 더 많이 수행되는 학과도 비일비재하다. 우리 지역에 소재한 대학들의 경우 시간강사들이 수행하는 학사 비중은 수도권 대학이나 다른 광역시의 대학들에 비해 적지 않지만 이들에 대한 대우는 매우 열악하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 비단 시간당 수당이 작다는 이유만은 아닌 듯하다.
가을학기 개강을 목전에 두고 있다. 자질이 넘치는 전임교수를 채용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훌륭한 시간강사를 초빙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사안이라고 본다. 그리고 강의를 감당하고 있는 시간강사 선생님들을 정성껏 대우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일이다. 교육적인 감동은 가르치는 사람의 외형상의 지위에 있지 않고 그가 가진 인격과 열정, 그리고 전문지식 체계의 깊이에 달려 있다.
선심 쓰듯 ‘자리하나’를 마련해 주면서 요모조모 우려먹을 궁리의 대상으로 시간강사를 취급해서는 안된다. 우리 학생들을 위해서 꼭 필요한 분이라면 삼고초려 해서라도 정중히 모셔 와야 할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 필자는 비록 한 시간일망정 그것을 천직으로 여겨 온 시간강사 선생님들한테서 더 많은 감동과 교훈을 얻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또, 앞으로도 우리들의 대학사회는 여전히 그러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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