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에 제정된 아일랜드의 신헌법은 여성의 역할을 주부와 어머니로 한정했다. 이혼이나 피임, 심지어 강간을 당했을 경우에조차 낙태가 허용되지 않았다. 카톨릭 국가로서의 오랜 전통 때문이다. 프랑스의 나폴레옹법에서도 여성의 역할은 가정에 국한되었다. 1328년에 제정된 살리크법에는 여성이 왕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이 있다. 미국의 정당들은 중앙당을 별도로 조직하지 않는다. 정당 보스의 공천권도 허용하지 않고 오픈 프라이머리제를 실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여성의원 비율이 183개국 중 67위인 것은 종교적 도덕주의에 기반을 둔 보수성이나 소선거구 다수대표제와 무관하지 않다.
이 세 나라에서 여성 대통령과 후보가 배출되었던 배경을 주목할 만하다. 아일랜드에서는 1990년에 메리 로빈슨이 첫 여성 대통령이 되었으며, 뒤를 이은 메리 맥클리스는 재선에도 성공했다. 프랑스에서는 지난 대선에서 세골렌 루와얄이 사르코지를 맹추격했다. 미국에서도 힐러리 클린턴과 더불어 콘돌리자 라이스가 여성과 흑인이라는 이중 유리천정 장벽을 넘어 유력한 후보로 부상하고 있다.
로빈슨, 루와얄 그리고 라이스 이 세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뛰어난 전문성이다. 로빈슨은 23세의 나이에 변호사가 되었고, 25세에 교수로 임명된 후 46세에 대통령이 될 때까지 아일랜드 법조계를 주도했다.
루와얄은 변호사, 대통령 기술자문, 3선 국회의원, 환경부, 교육부, 가족어린이부 등 3개 부처의 장관을 역임했다. 라이스는 스탠포드대의 최연소 부총장으로 6년간 재직했다. 국가안보보좌관을 거치면서 정확한 분석력, 빠른 판단력, 주요 현안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며,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 되었다. 둘째, 인식의 지평이 확대된 유연한 사고력의 소유자들이라는 점이다.
로빈슨은 19세기적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했던 20세기의 아일랜드에서 21세기적 법정신으로 이혼과 피임의 합법화, 동성연애법 제정에 앞장섰다. 루와얄은 사회당 후보이면서도 무노동 무임금정책을 지지했다. 교사의 주 35시간 근무제 유지, 학교 운영에서의 부모역할 강화, 따돌림방지법 제정 등 교육정책에서도 확고한 입장을 견지했다. 라이스는 부시 행정부의 대표적인 신보수주의자이지만 온건한 네오콘이다.
셋째, 투철한 성 인지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로빈슨은 여성배심원제 도입, 남녀동등임금법, 이혼여성 재혼법 제정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루와얄은 부성육아휴가제를 도입했으며, 라이스는 취임 직후 “어린 여자”라는 동료의 표현에는 단호하게 대처하면서도 “적 만들지 않기”라는 신조로 여성 특유의 친화력과 부드러움을 견지해 힐러리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올 대선 정국에는 한국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네 명의 여성이 대권 도전 의사를 밝혔다. 아일랜드, 프랑스, 미국보다 여성에게 더욱 보수적인 한국에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려면 이들 나라에 공통적으로 구비되었던 조건들이 우선적으로 충족되어야 한다.
여성의 시대 21세기에 100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던 프랑스가 새삼 연상된다. “여성이 대통령이 되면 아이들은 누가 돌볼 것인가?”라던 도미니크 스트라우스 사회당 후보와 “대통령 선거는 미인대회가 아니다”라던 자크 랑 전 문화부장관의 발언은 불과 수개월 전의 일이었다. 한국의 여성들은 이러한 프랑스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장밋빛 여성공약을 잇달아 제시하는 후보들에게 명확하게 물어야 한다. “한국 사회여, 준비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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