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시간, 잠도 깨지 않은 상태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듣기만 하여도 소름이 끼치고 머리가 쭈뼛 설정도로 오싹하기 조차한 금속 마찰음 끝에 나는 충돌소리다. 가뜩이나 더위로 잠을 설치고 있던 차에 신경이 곤두선다. 필경 큰 일이 났나보다 하고 창밖으로 밖을 쳐다보면 틀림없이 차량이 심하게 망가지고 이내 차속에서 부축을 받으며 나오는 사람의 이마에는 피가 범벅이고 차량은 뒤엉켜 교차로는 아수라장이 된다. 지옥이 따로 없다.
본인이 사는 곳은 중심가의 대로변, 큰 교차로를 끼고 있는 공동주택이다. 이런 소리를 며칠이 멀다하고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 모두가 하찮은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다. 그 약속은 바로 누구나가 지켜야만 하는 신호다. 신호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교통사고의 사회적 비용이나 그로 인한 가족들의 고통이나 비참함은 여기서 논외로 치자.
TV를 통해서 일본과 미국의 경우를 방영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도쿄의 중심가 한 복판, 심야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차량들이 신호를 정확히 지킨다. 물론 보행자도 보행신호에 따라 횡단보도로 길을 건너고 무단 횡단하는 경우는 눈 씻고 볼래야 찾아 볼 수 없었다. 보행자가 있든 없든, 통행차량이 있든 없든 간에 차량이나 보행자나 모두가 한결같이 신호를 지킨다. 미국의 어느 주인지는 몰라도 두 갈래 길이 합쳐지는 소위 병목(Bottle Neck)구간이다. 합쳐지는 지점에 신호등이 하나 있고 주기적으로 파란 불이 들어온다. 파란 불이 들어올 때마다 양쪽에서 번갈아 가면서 질서정연하게 차량 한대씩 진입한다. 그것을 일러 ‘One Car Per Green`이라고 한다. 모두가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 단적인 증거다.
우리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차량 통행이 비교적 뜸한 심야시간대나 새벽 시간대에는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차량은 차량대로 파란 불, 빨간 불 신호에 관계없이 질주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횡단보도와 보행신호 구분 없이 아무 때나 그리고 아무 데서나 길을 건넌다. 병목 구간에서 한 번 양보를 하게 되면 다시는 진입할 기회가 없는 양 기를 쓰고 앞차의 뒤를 바짝 쫓는다. 소위 꼬리 물기다. 꼬리 물기가 도(度를) 지나쳐 교차로는 아수라장이 되고 신호는 무용지물이 된다. 그래서 경찰은 꼬리 끊기로 단속한다. 하지만 단속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경찰이 보이면 지키는 듯 하다가도 보이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모두가 약속을 무시하는 데 익숙해 있다. 그 사람들의 변명은 대개가 한결같이 “약속시간에 늦어서, 급해서, 또는 앞차가 가니까”이다.
신호도 약속이다. 신호는 운전자와 운전자간, 그리고 운전자와 보행자간에 이미 합의된 약속이고 규범(Norm)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어떤 특정 개인 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간에 공통적이고도 보편타당하게 이루어진 매우 중요한 약속이며 일종의 불문율이다. 어찌 보면 개인 간에 이루어진 약속보다도 그 이전에 오래 전부터 이미 지키기로 합의된 선약(先約)이다. 그리고 약속은 서로 지켜질 때 아름다운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앞선 약속부터 지키는 것이 순서이고 도리라고 생각한다. 또 약속은 지켜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사소한 개인적인 이익을 앞세워 다중의 공동생활에 꼭 필요하며 절대다수의 이익과 선(善)을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약속을 어겨,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잠을 설치게 하는 행위야말로 ‘공공의 적`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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