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제나 만만찮은 삼복더위 여름 보내기
‘삼복 염천(炎天) 당할 장사 없다’고 삼복더위를 이기며 여름을 보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만만찮은 일상사였던 모양이다.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동북쪽으로 두세 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인 청더(承德)는 사실상 청나라의 ‘여름 수도’였다. 1994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황제가 체류하던 저택인 피서산장(避暑山莊)이다. 청나라 황제들은 여름 내내 피서지인 이곳에 머물면서 국사를 돌봤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삼복더위를 이기고자 하는 갖가지 세시풍속이 행해져 왔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더위를 이겨 내라는 뜻에서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빙표(氷票)를 주어 관의 장빙고에 가서 얼음을 타가게 하였고, 민가에서는 모래찜이나 탁족(濯足)을 하며 ‘복다림’이라 하여 구장(狗醬)이나 닭죽 같은 보양식을 먹곤 했다.
삼복 중인 지금, 여름 무더위를 피하고자 하는 피서 휴가가 절정을 맞고 있다. 출퇴근길이 한결 한산해질 정도로 도심을 떠나는 인파가 줄을 잇는다.
휴가 행렬을 바라보면서 21세기의 새로운 문화 트렌드로 주목받고 있는 다운시프트(downshift)를 떠올린다. 다운시프트가 자동차의 기어를 고단에서 저단으로 바꾸어 속도를 줄이는 것을 뜻하므로, 삶에서의 다운시프트란 인생의 기어를 낮추는 것을 의미한다. 바쁜 일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이 긴장을 줄이고 여유를 갖는 것을 말한다.
고도성장의 세태에 맞추어 언제부턴가 ‘빨리 빨리’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다운시프트라는 용어는 생소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의 옛 생활문화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다운시프트의 사상적 뿌리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노장사상과 자아의 수행과 깨달음을 중시하는 사상의 영향이 진하게 남아 있다. 서서히 가열되는 온돌의 주거문화, 김치와 된장처럼 시간 흐름이 뒤따라야하는 발효문화, 삶의 여유로움과 숙성된 깊은 맛을 즐겨왔던 정신문화 등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였던 것이 우리의 생활문화였다.
조상의 지혜로 깨닫는 여름휴가의 여유와 생동감
흙을 갈아 씨를 뿌리고 1년 내지는 길게는 5년을 수고하여 수확을 기대했던 농경문화권의 우리 민족이 추구했던 느림의 미학은 넓고 깊다. ‘어정 7월’이 삼복더위의 숨막힘을 피해 아무런 의욕없이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자는 뜻이었을까. 이어진 ‘동동 8월’이 세상 모든 일을 ‘빨리 빨리’ 재빠르게 해치워 인정받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뜻이었을까.
휴가는 일상을 탈출하는 하나의 여정이다. 그러나 그 여정이 일상으로부터의 단순한 일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숨 막히는 일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전이(轉移)를 준비하는 생동의 기운을 갖고자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휴가란 충전의 기회라는 말로도 풀이된다. 다른 무엇을 채우기 위한 새로운 분위기를 갖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채우기 위한 전제 조건이 있다. 비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자신을 비우는 여유를 가지면서 다가올 시간들에 대한 채비를 다지는 것, 삼복 염천을 견디면서 우리 조상들이 속 깊이 가꾸어왔을 ‘어정 7월’의 여유와 ‘동동 8월’의 생동감을 새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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