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된 영상미로 빚은 한국 공포의 이정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 “사랑해”
첫 번째 이야기는 “제국주의가 극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안생병원 안에선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다”는 내레이션으로 입을 뗀다. 병원장의 딸과 영혼결혼식을 앞둔 의학도 정남(진구)이 겪는 한 여름 밤의 꿈.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해 강물에 몸을 던진 여고생의 시체가 병원에 들어오고 정남은 ‘가장 좋은 시절을 봉인한` 그녀를 부러워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부모가 모두 사망한 끔찍한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은 소녀 아사코(고주연)를 보살피는 의사 수인(이동규)의 이야기다. 사고 희생자들은 소녀를 괴롭히고 수인은 최면요법을 이용해 악몽의 원인을 밝혀내려 한다.
세 번째 이야기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정남 등 의학도를 가르치게 된 인영(김보경)과 동원(김태우)의 이야기. “그때까지 아내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동원의 내레이션이 사건의 시작을 알린다.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려 병원이 폐쇄되기 전 나흘간의 미스터리한 사건을 담았다.
기담에 등장하는 1940년대 경성은 우울하면서 아름답다. 아름다운 벚꽃이 휘날리고 전차가 오가는 거리는 한국인지 일본인지 모르는 낯선 공간. 아름답긴 하지만 뭔가 어긋난 듯한 낯설고 날선 느낌, 겉으론 아름답지만 속은 또 다른 이중성이 기담이 그려내는 공포다.
이런 분위기는 아련한 색채로 표현된 세련된 영상미와 절제된 사운드, 효과적으로 사용된 정갈한 음악으로 극대화된다. 피아노와 현악 앙상블이 어울리는 클래식 음악은 공포를 겹겹이 덧입히고 그로테스크한 괴기함을 더해 준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뭘까. ‘기담`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거라고 들려준다. 엄마보다 새 아빠를 더 사랑한 딸, 죽은 딸을 살아 있는 남자와 결혼시키려는 원장, 어느 날 아내의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의사…. 지독한 사랑은 때로 섬뜩한 러브스토리로 결말이 날 수 있다. ‘기담`에서 가장 무서운 공포는 “사랑해”라는 말이다. ‘한국형 공포의 원형` 찾기가 하나의 결실을 맺었다고 할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룬 작품. 15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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