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곤 형으로부터 온 이메일이었다. “아무 때나 마음 내키실 때 전화주세요. 즐거운 마음으로 받겠습니다”도 첨언했다. 보고 싶었다. 참았다. 일단 일터 떠난 사람이 여기저기 얼굴 내미는 행태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는 어쭙잖은 신조 탓이었다. 신진기예의 류 교수 이메일이 왔다. 그간 한 번도 모시지도 못했다며 미안해 했다. 평소 좀 과하게 진지했다. 막내로서 궂은 일 마다 하지 않았다.
순수한 진심을 읽었다. 촌티 날 정도의. 나는 완곡하게 그저 그냥 자유 만끽하게 놔 두는 게 돕는 거라 답했다. 언제 식사 한 번 하자는 말은 거짓말이다. 우선 내가 그렇다. 그런 식으로 응대할 경우에는 그럴 의사가 별로 없다. 정 궁금한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다. 바로 일정표 꺼내서 날자 정한다. 헌데 굳이 누굴 만나며 번거롭게 지내고 싶지 않다.
첫 직장 냄새는 지워지지 않고 있다. 애써 그렇게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강산이 몇 번 변한 세월을 지낸 그곳의 내 이미지다. 몇 년의 시간으로 지워질 리도 없다. 오늘에 이어진 개인역사의 나를 그대로 지니고 산다. 역설이지만 그래야 해방된다. 다만, 이게 내 인생은 아닌데 하는 생각은 떨쳐 버리질 못 했다. 회사와 학교에 몸을 두고 있다. 나쁘다는 게 아니다. 일하니 좋기만 하다. 공직자가 자리를 물러 난 후에는 낙향이 이상이라는 아집 때문이다. 책무로부터의 해방 속에서 여유만만하게 살고 싶어서다.
낙향한다는 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후진 양성이다. 하나는 온전한 사적 삶이다. 책 보고 글 쓰며 낮잠 자고 마나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기하는 유유자적. 그 느긋함 속에서 강의하는 하는 생활이 꿈이다. 21세기에 사고와 의식은 의연 19세기다. 퇴직자는 예전에 했던 직무와 연계된 일을 한다. 불가피하다. 그게 쓸모다. 처신이 어렵다. 그간 지녀 온 원칙을 잠깐잠깐 접어야 할 때도 있다. 해서는 안 될 무리수를 둘 일도 있으리라. 부작용의 회오리에 휘말린다. 몇 십년 가꿔야 세워지는 품격을 송두리채 실추한다. 며칠 전 일본에서 전직 공안조사청 장관이 체포됐다.
그 기관은 폭력적 파괴활동을 단속한다. 조총련은 그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퇴직 후 조청련의 고문 변호사가 되었다. 윤리면에서 적절치 않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불량채권문제로 조총련 본부 건물이 경매에 부쳐질 지경이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서는 미리 매매계약을 체결케 중개하고 알선했다. 물론 돈은 오가지 않았다. 서류 상으로만 팔고 샀다. 등기까지 마친 혐의였다. 불법행위였다. 극단의 케이스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비리는 비일비재하다.
물러나는 선배의 글이 왔다. 34년 동안 집과 일터를 오가던 행위를 접었다는 소식이었다. 매일 무심코 내리던 현관이 없어졌다. 나섬과 일함과 돌아옴의 상실이다. 그 크기와 무게를 나는 안다. 형은 담담했다. 처음으로 돌아간다 했다. 누구나 살면서 동시에 정리와 축소를 향해 간다. 모두에게 취직이라는 처음과 퇴직이라는 끝이 예정되어 있다. 미리 손 턴 후를 걱정하는 어리석음에 빠진 후배들에게 말한다. 현역시절의 후회 없는 열정이 최상의 은퇴책이라고. 그런 시간 있으면 바로 지금에 투자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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