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건보다 그날 그 사람들의 이야기
“기억해 달라” 는 절박한 호소 눈물 자아내
계엄군이 도청을 떠나기로 한 시각. 도청 앞에 모여든 시민들은 70년대 히트곡 ‘잘 가세요`를 승리의 축가처럼 떠들썩하게 부른다. “잘 있어요. 잘 있어요. 그 한마디였었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인사만 했었네….” 애국가가 울리고 노래를 멈추고 부동자세를 취하는 시민들. 그 순간 날카로운 파열음이 공기를 찢고 그들의 가슴으로 총탄이 날아든다. 대한민국 군인들이 애국가를 배경음악으로 시민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다. 금남로는 순식간에 지옥으로 돌변한다.
# 둘
광주 교외의 한적한 도로. 시외버스가 멈추고 급히 내린 시민군이 논 사이에서 배를 움켜쥐고 설사를 한다.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원들이 버스에 다가서고. 계엄군은 평범한 승객들을 내리게 해 줄지어 세워놓는다. 총소리.
80년 5월 광주. 그 때 그 현장, 그 때 그 사건들이 스크린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되지만 영화가 이끄는 지점은 사건 속으로가 아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이다.
똑똑한 동생 진우(이준기)의 서울대 법대 진학만을 바라며 뒷바라지하는 택시기사 민우(김상경). 그에겐 첫눈에 반한 사랑이 있다. 새침하고 어여쁜 간호사 신애(이요원). 둘이 극장에서 데이트를 하는 도중 매캐한 최루탄 연기가 고개를 들이밀었고, 역사의 격랑 속으로 이들을 밀어 넣는다.
영화는 택시회사를 운영하는 신애의 아버지 흥수(안성기), 우스갯소리 잘하는 민우의 동료 인봉(박철민), 잘 나가는 제비족 용대(박원상) 등 이들 평범한 광주 시민들이 겪었을 당황, 공포, 분노, 연대감, 희망, 절망, 그리고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자기 존엄을 살아있는 육성으로 들려준다.
‘화려한 휴가`는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영화로 되살려내 역사의 망각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분명 미덕을 지녔다. 또 5·18을 직설화법으로 다루면서 ‘영문도 모른 채` 자기방어적으로 역사에 휘말리는 시민의 시선으로 그려낸 것도 좋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겠다 싶기도 하지만 시위에 나선 시민들의 요구와 절박성이 깊이 있게 담겨지지 못한 건 아쉽다.
제작사인 기획시대의 유인택 대표는 “5·18을 소재로 한 대중영화”임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영화임을 빌어 시민을 향해 발포하게 한 장본인을 드러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우리를 기억해주세요”라는 신애의 절규로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들쑤시는 영화가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그런 비극이 다시는 없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언질이 전혀 없는 것도 아쉽다. 잘 봤으면 됐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가? 하기야 한국영화가 5·18 광주로 들어가기까지 27년씩이나 걸렸으니. 12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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