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카니스탄에서 우리나라 봉사자들이 억류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우리는 이념과 원칙만을 고수하는 거대한 조직 앞에서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역사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간이 살아 온 과정에 일어난 사실’을 가리킵니다. 독일의 역사가인 랑케는 역사가의 주관을 철저히 배제한 객관적 사실만을 기록할 것을 강조하였고, 거기에 반하여 영국의 역사학자인 카(E. H. Carr)는 과거의 사실을 보는 역사가의 관점과 사회 변화에 따라 역사가 달리 쓰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아프카니스탄에 억류되어 있는 동포들이 무사히 석방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민과 함께 우리 나라의 국력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억류된 우리 동포들은 총탄이 오가는 전장에 뜨거운 인류애로 봉사하고자 떠났다고 합니다. 한편 그들의 봉사정신은 위대한 인류애이지만 위험한 지역을 가는 것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 사건에 대한 조명이 라케와 카의 주장처럼 서로 맞물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쟁과 공존입니다. 우리가 세계와 경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국력을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유가 거기서 멈춘다면 시너지 효과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잘 산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 살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쟁과 공존은 양면성이 아니라 상하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경쟁을 하는 이유를 공존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소중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 시켜주는 소중한 산소도잠수부가 100% 순 산소만 흡입할 경우 근 무력증, 의식 상실등의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수부의 산소탱크에는 실제 공기와 같이 산소 20% 질소 80% 정도로 넣어 산소와 질소를 공존시킵니다.
질소가 필요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질소는 몸의 성분들과 잘 반응하지 않는 물질이라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공존에 강한 민족입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에서부터 농경사회를 거치면서 생성된 ‘두레’라는 것도 있고, 지금 이 시간에도 대한민국은 다 함께 잘 살기 위한 높이뛰기와 넓이뛰기에 여일이 없습니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높이뛰기나 멀리뛰기의 도움닫기는 교육이란 이름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육은 인간을 만드는 일이고, 인간이 되어야 경쟁을 거친 공존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세계화, 개방화 시대를 맞이하여 다른 문화를 접해 보면서, 서로의 가치관을 이해하는 공존의 필요성에 대한 학습은 이제 우리나라만이 아닌 인류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방학입니다. 선생님들은 각종 연수로, 학생들은 독서와 체험학습으로, 학부모님들도 건강과 휴식으로 재충전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줄 믿습니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우리 대전교육가족이 공존을 위한 시간에 올 여름 휴가를 투자했으면 합니다.
방학이 끝나면 채점해 보시겠어요? 모두 만점 맞으시기를 바라면서 청자빛 하늘과 물빛을 선물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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