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완하 한남대 문창과 교수 |
나뭇잎들이 웅숭깊게 키워내는 진초록 사이로는 훤히 드러난 하늘이 참으로 맑고 명징하게 떠있다. 그러한 숲에서는 반드시 매미가 떼로 운다. 매미가 울지 않는 여름은 여름이 아니다.
나무들이 드리우는 그늘 속의 서늘함에 들어앉아 명상에 잠기면 여름 땡볕 속에서도 여유를 지니며 느림의 미학 속으로 한껏 깊이 빠져들 수가 있다. 나무들의 초록빛 숨결에 감싸이면서 생각을 모으면 한없이 깊은 몽상의 바다로 가 닿을 수가 있다.
그러나 여름은 이렇듯 초록의 숲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여름 한철 휴식을 위해서 우리가 기대어 서는 은행나무 가지를 올려다보라. 우리 눈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거기 하늘 닿는 곳마다 능소화는 제 슬픔의 꼭지를 말아 올려 서늘한 꽃등을 달아맨다. 그렇다. 여름은 이렇듯 능소화로부터도 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부턴가 여름이면 우리 가슴에는 잔잔한 슬픔이 고이게 된다. 그것은 바로 능소화 꽃잎 속의 바다에 밀물이 드는 까닭이다.
능소화는 나무를 기어 올라가 그 잎 사이사이로 붉은 주황빛의 꽃잎을 찢어놓는다. 세상에, 이렇게 염천 속에서도 제 붉은 속살을 다 풀어헤치는 꽃잎이 있다니! 그래도 사람들은 이런 불볕 속에서도 피는 꽃이 있느냐고, 발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린 꽃잎은 쳐다보지도 않고 잰걸음으로 길을 가는 것이다. 그들은 능소화의 꽃 이름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꽃 이름도 모르는 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바로 그 어깨 위에서도 조금조금씩 능소화의 꿈은 뜨겁게 벙그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왜 이 땡볕 한낮 여름에 능소화는 쓸데없이 꽃을 피우느냐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그대가 길을 가면서 떨구는 한낮 그림자도 실은 그대의 꽃잎이 아니냐, 눈물 아니냐, 그리움이 아니더냐? 왜 쓸데없이 한낮 땡볕에 꽃은 피워서 지나던 길을 멈추고 서서 그 꽃을 올려 바라다보게 하느냐고 투정하지도 마라. 능소화도 잠시 그대와 함께 마주 서서 바라다보고 싶은 것이다. 그대와 진실로 눈길을 맞추고 싶은 것이다.
능소화는 제 속살을 아프게 아프게 발라내며 피우는 꽃이다. 지금 그의 발아래는 뚝 뚝 떨궈진 핏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다. 그의 발등에는 찢어진 꽃잎이 세근이나 쌓여 있다. 능소화는 피운 만큼 꽃잎을 떨구는 꽃이다. 그러니 능소화는 꽃잎을 떨구기 위해서 피우는 꽃이 아니냐? 그대는 떨어트리기 위해서 피우는 꽃의 심장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이제 길을 걷다가 능소화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마라. 능소화의 떨어진 꽃잎 하나라도 주워 들고서 손안에 감싸 보라. 그 꽃잎의 팔딱거리는 숨소리가 그대의 손안에 깊게 배일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촉감이다. 그 생명의 촉감이 그대의 손안에 새로운 하늘을 열어줄 것이다. 줄기로 숨 가쁘게 감고 올라가는 능소화에게 등을 내어주는 나무들을 보라.
그 나무는 능소화 줄기와 하나 되어 그림자를 이루고 누워 있다. 그러므로 작은 꽃 하나라도 다른 도움 없이는 피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주변을 관심 있게 돌아보아야 한다. 앞으로만 숨 가삐 달려가던 눈길을 거두고 우리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지, 뒤에서는 또 어떤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능소화는 땡볕 속에 피어서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바로 그게 능소화의 꿈이다, 희망이다,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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