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에서 상대 약점에 기생수처럼 빌붙는 네거티브 전략은 약인가 하면 독이다. 이명박-박근혜 진영의 피 튀기는 검증 공방도 약을 쓰려다 독배를 집어든 꼴이다. 관리나 대응을 잘할 때에 한하지만, 어떤 공세를 신선하고 호쾌한 게임으로 끝내준다면 오히려 청량감이 더해져 높은 점수를 딸 수 있다.
모든 것이 다다익선(多多益善)은 아니다.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중용은 여기서 여전히 통한다. 자유가 과도하면 방종이 된다.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의 뿌리는 무한 자유경쟁에도 있었다. 어떤 종교든 고삐가 풀리면 사회적 독이 된다. 과도한 화장은 화장독을 일으켜 고유의 아름다움마저 해친다. ‘웰빙’ 붐은 빈자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을 더하게 한다.
경선 과정의 다툼도 그렇다. 다양성이 약이 아닌 독이 될 때 ‘파란 거탑’의 꿈은 거품처럼 허황하다. 실험동물에게 평생 투여해도 독성이 안 나타나는 섭취량의 한계를 ‘최대무작용량’이라 하는데, 한나라당의 분란은 최대무작용량을 넘어설 만큼 정도와 속도가 지나치다. 어디 용한 한의원에나 찾아가서 독성을 낮추고 약효를 높이는 법제(法製)라도 배워봐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더 큰 문제는 안 마셔도 될 독약까지 자청해 마시는 경우다. 고소를 취하한다, 취하하지 말라 해서 비껴간다 한들 의혹만 갖고 유죄판결을 내리는 유권자들이 있고, 더구나 국민정서법은 헌법의 상위에 있다. 일단 국민에 찍히면 어떤 말도 소용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대통령 후보가 검찰청사에 들락거리는 신세가 전개된다면 보약을 의도했어도 그건 독약이다.
약발을 잃고 나서 득실을 따져봐야 하등 의미가 없다. 허준은 광해군의 학질을 낫게 하면서 극약인 비상(砒霜)을 처방한다. 자신이 태어나기 5년 앞서 세상을 뜬 파라셀수스를 허준이 알았을 리 만무하지만 독도 잘 쓰면 약이라는 생각은 파라셀수스와 같다. 경선 과정의 미세한 독이 경쟁력인 것은 경쟁이 아름다울 때에 한한다.
약에서도 경선에서도 미량의 독소가 이로울 수 있다. 이를 호르메시스(hormesis) 이론으로 부르자. 약이 독이 되는 치명적인 대가를 두 번씩이나 치른 한나라당은 이만하면 복용량에 따라 약일지 독일지 익히 알 것이다. 호르메시스의 범위를 넘으면 약이 독이 되는 그 지점, 그 순간에 놓인다는 사실도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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