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들려주는 후일담은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 동시에 현실을 무시하지 말라는 냉엄한 메시지다. 낙관론의 결과가 비관론이나 현실론보다 못할 때가 실제 우리 현실에서 많다.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 출발이 산뜻하지 않은 비정규직 관련 법안이 바로 이런 범주에 해당한다.
제도화의 역설이라 할까. 양극화 해소용 법으로 인해 비정규직 양극화가 진행 중이다. 법이 허용하는 이상으로 빵빵하게 처우하겠다는 잘나가는 회사가 있긴 하나 물론 동전의 한 면이다. 신분은 정규직, 임금은 비정규직인 ‘중규직(中規職)’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애꿎게 비정규직만 내쫓게 생겼다. 정규직 전환 기준 ‘2년’이 해고 기준점으로 표변해 애간장을 태우게 한다. 법이 무서워서 자르고 피하려고도 자른다. 이것이 동전의 나머지 한 면이다.
길을 가다가, 공짜 뻥튀기를 나눠주며 비정규직을 해고하는 비정규직보호법을 조롱하는 퍼포먼스를 봤다. 이 정도는 아니니라 믿었다. 그 믿음을 깨고 임금, 근로조건, 복지 차별을 없앤다는 개념을 비웃으며 풀타이머가 시간제나 용역직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대량 해고, 단기 계약, 외주 용역과 같은 변칙을 막을 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탓이다. 이 정도는 예견했어야 한다.
그 결과, 사회적 약자에게 공공적 우대 조치를 하겠다는 발상(=어퍼머티브 액션)이 경영 위험을 겁내는 기업들로 하여금 의도한 취지와 상반된 길을 걷게 하고 있다. 자금난, 기술난, 인력난의 3난에 허덕이는 지역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다 잘못하면 처우 개선, 일자리 창출, 산업현장 안정 등 세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칠 수도 있는 자기파괴의 인과 사슬에 묶이게 생겼다.
근거 없는 낙관이, 장점이라는 확신이 맹점으로 화한 것이다. 고용 안정에 대한 과잉된 희망은 고용 불안을 부른다. 비정규직보호법이 비정규직을 낳고 불평등을 고치려다 또 다른 불평등을 키워 정말로 ‘뻥’이 될지 모를 지금이라면 스톡테일 장군은 “매사에 ‘안과 밖’이 있습니다. 기대를 줄여 대비하세요”라고 잔잔히 충고할 것이다. 그래도 그저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레이먼드 베이커)으로, 시장체제의 사기(존 갤브레이스)로 치부하고 끝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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