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밤에 담 구멍을 뚫고 자물쇠 고리를 열고 주머니를 찾고 상자를 열어 의복, 이불, 제기(祭器), 술그릇을 훔치고, 혹은 가마솥을 떼어서 도망하는 사람이 도적인가? 아니다. 이는 다만 굶주린 사람이 배가 고파서 저지르는 것이다. 칼을 품안에 품고 몽둥이를 소매에 넣고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사람을 막아서 그 소` 말과 돈을 빼앗고는 그 사람을 찌르고 그 일을 아는 사람을 죽여 없애는 사람이 도적인가? 아니다. 이는 다만 어리석은 사람이 본성을 잃고 하는 소행이다.
수놓은 언치를 깐 준마를 타고 하인 수십 명을 데리고 횃불을 벌려 세우고, 창과 칼을 들고서 부잣집을 골라 마루에 올라가서 주인을 묶어 놓고 화폐가 들어있는 창고를 몽땅 털고는 그 창고를 불사르고 서약을 다짐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한 사람이 도적인가? 아니다. 이는 다만 교육받지 못한 오만한 자의 소행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도적인가? 부신(符信) 주머니를 차고 인수(印綬)를 띠고서 한 성(城)이나 한 보(堡)를 독차지하고 온갖 형구(形具)를 진열해 놓고 날마다 춥고 배고파 지칠대로 지친 백성들을 매질하면서, 피를 빨고 기름을 핥는 자가 도적인가? 아니다. 이는 비슷할 뿐이요 역시 작은 도적이다.
큰 도적이 있다. 큰 깃발을 세우고 큰 양산을 받치고 큰 북을 치고 큰 나팔을 불면서 쌍 말의 교자(轎子)를 타고 옥로(玉鷺)가 달린 모자를 쓰고 있다. 그리고 종자(從者)는 부(府) 2인, 사(史) 2인, 서(胥) 6인, 보졸(步卒)이 수십 인, 하인과 심부름꾼과 졸복의 무리가 수십 수백 명이다.
여러 현(縣)과 역(驛)에 안부를 묻고 영접하는 아전과 하인이 수십 수백 명, 기마(騎馬)가 1백 필, 복마(卜馬)가 1백 필, 아름다운 의복을 입고 예쁘게 화장한 부인이 수십 명, 동개에 넣은 화살을 짊어지고 행렬의 맨 앞에 서서 가는 비장(裨將)이 2인, 맨 뒤에 가는 사람이 3인, 따라가는 역관이 1인, 말 타고 따라가는 향정관(鄕亭官)이 3인, 부신(符信) 주머니를 차고 끈을 늘어뜨린 채 숨을 죽이면서 말 타고 따라가는 사람이 4, 5인, 붉기도 하고 희기도 한 족가(足枷)와 몽둥이를 포개어 싣고 가는 자가 4인, 등에는 횃불을 지고 손에는 청사초롱을 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수백 인, 손에는 채찍을 쥐고서 백성들을 호소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8인, 길가에서 보고 탄식하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다.
이르는 곳마다 화포를 쏘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태뢰(太牢)를 갖추어 올리는 사람이 넘어지고, 한 번의 식사에 혹시라도 간을 잘못 맞추었거나 음식이 식었거나 하면 담당자를 곤장치게 하니, 곤장치는 사람이 모두 10여 인이나 된다. 일일이 죄를 들어 다음과 같이 책망한다.
“길에 돌이 있어서 내 말이 넘어졌다.”, “떠드는 것을 금지시키지 않았다.”, “영접하는 부인이 적었다.”, “병풍과 대자리와 돗자리가 볼품없었다.”, “횃불이 밝지 않고 구들이 따뜻하지 않았다.”
좌정하고 나서는 서리(胥吏)와 졸사(卒史)를 불러서 여러 군현(郡縣)에 공문을 보내어 바칠 곡식을 돈으로 환산하여 바치도록 명하고 나서, 1곡(斛)의 값으로 1백 50냥을 바치면 노하여 꾸짖으면서 2백 냥까지 값을 올리게 한다. 그래서 곡식으로 짊어지고 오는 백성이 있으면 곡식은 받지 않고 돈으로 2백 냥을 물도록 한다. 다음해 봄에 2백 냥을 셋으로 나누어 그 중 하나를 백성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1곡(斛)의 곡식 값이다.”
바닷가에는 부상(富商)과 대고(大賈)가 많아서 곡식 값이 폭등하면 광에 저장했던 곡식을 모두 내어다 팔아 돈을 만들고, 산 고을에는 곡식이 많아 썩으면 이를 싸게 사서 창고에 저장하고 노적(露積)도 하게 된다. 이에 곡식이 다리가 생겨서 하루 동안에 백 리를 달리게 되고 7일이면 7백 리를 달려가서 바닷가에까지 가게 된다.
바닷가에 사는 주려서 지친 백성들은 고달픔을 견디다 못해 아내와 자식을 팔면서 피거품을 토하다가 잇달아 쓰러져 죽게 된다. 그러고 나서 남은 돈을 계산해보면 수천 수만 냥에 달한다. 묘지(墓地)에 대해 송사하는 사람은 유배시킨다. 영장(令長)이 가혹한 정치를 한다고 호소하면 유배시키고, 그 벌금(罰金)은 40냥에서 1백 냥까지다. 병든 소를 도살한 사람은 유배시키고 그 벌금은 30냥에서 1백 냥까지다. 이렇게 해서 남은 돈을 계산해 보니 수백 수만 냥에 달한다.
토호(土豪)와 간리(姦吏)들이 도장을 새겨 위조 문서를 만들고 법률 조문을 멋대로 해석하여 법을 남용하면, “이것은 못 속의 물고기이니 살필 것이 못 된다.”하면서, 감싸 숨겨준다. 효도하지 않고 우애하지 않고 아내를 박대하고 음란한 짓을 하여 인륜을 문란시킨 사람이 있으면, “이것은 말을 전하는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이다.”하면서, 전연 모르는 듯이 지나쳐 버린다. 부신(符信) 주머니를 차고 인끈을 늘어뜨린 사람이 곡식을 판매하고 부세(賦稅)를 도적질한 것이 이상과 같은데도 이를 용서하여 보존시킴은 물론, 등급을 정할 적에도 제일로 매겨 임금을 속인다.
이런 사람이 어찌 큰 도적이 아니겠는가. 큰 도적인 것이다. 이 도적은 야경(夜警) 도는 사람도 감히 따지지 못하고, 의금부(義禁府)에서도 감히 체포하지 못하고, 어사(御使)도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재상(宰相)도 감히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멋대로 난폭한 짓을 해도 아무도 감히 힐문하지 못하고, 전장(田庄)을 설치하고 많은 전지를 소유한 채 종신토록 안락하게 지내지만 아무도 이러쿵저러쿵 헐뜯지도 못한다. 이런 사람이 어찌 큰 도적이 아니겠는가. 큰 도적인 것이다. 그래서 군자(君子)는 이렇게 말한다.
“큰 도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이 다 죽을 것이다.”
- 정약용, <감사론(監司論)>에서, 다산시문집 제12권
▲부신(符信) : 조선 시대 병조 등에서 발행한 여러 가지 신표(信標). ▲인수(印綬) : 관리의 관직을 표시하는 인(印)과 인의 고리에 맨 30cm 정도의 끈. ▲보(堡) : 조선 시대 군역 부과 단위. ▲족가(足枷) : 중죄인(重罪人)을 가두어 둘 때 쓰던 형구(刑具)의 한 가지. 차꼬. ▲태뢰(太牢) : 나라 제사에 소를 통째 제물로 바치던 일. ▲감사(監司) : 외직 문관의 종이품 벼슬로 각 도의 장관을 일컫던 말.
(나)
이백여 명이 넘는 기마부대였으나 각자가 맡은 대로 오를 나누며 잽싸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관가로 나아가면서 관가에 통한 샛길마다 한 오씩 지키고, 일 대는 먼저 관가 옆의 영으로 달려가 불을 질렀다. 자다가 뛰어나오는 관군 이십여 명은 장교든 군졸이든 모두 사로 잡혔다. 관가 앞에 당도하자마자 칼을 빼어든 장정들이 말 위에서 담장으로 훌쩍 뛰어넘어가 대문을 열었고 반쯤은 밖을 포위하고 나머지는 말에서 나는 듯이 뛰어내려 관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 각기 맡은 처소로 달려갔다. 장길산은 좌우에 강선흥과 최흥복을 거느리고 다른 운봉산 식구들과 더불어 동헌으로 뛰어 들어갔다.
“양곡과 무명이 많이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어찌할까요?” “말꽁무니에 매어서 운산 고을 곳곳에다 뿌려두어라. 백성들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모두 쓸어갈 것이다.”
<중략>
신엽이 연상에 들었던 문서를 집어서 최형기의 무릎 앞에 던졌다. 최형기는 송구스러워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그것을 펼쳐들었다. 읽어나가는 중에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지만,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뢰배들이 깊은 산 골골마다 떼를 지어 인가를 약탈하고, 백주에 행길에 나타나 나그네의 전대를 터는가 하면, 웬만한 주군(州郡)을 치는 짓도 쉽사리 하는데, 최근에는 서흥에서 해서 활빈도를 자처하는 적당이 야간에 관가를 급습하고, 하리배와 병졸들은 거의가 달아났으며 병고와 미창이 유린을 당하였고, 수령을 우롱한 뒤에 새벽이 되어 종적을 감추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평산부사가 올린 밀계였다. 신엽이 눈을 크게 뜨며 최형기를 노려보았다.
“도적들이 이제는 관가 알기를 마치 솔가한 종놈의 집 드나들 듯 하고, 관리와 수령 보기를 대호가 삽살개 어루듯 하니, 내가 욕을 당하려고 외임으로 나왔단 말인가. 주상의 특수를 받잡고 해서에 나와 이렇듯 서적(鼠賊)의 무리에게 조롱을 당하니, 목이 잘려도 후대에 발명할 말이 없을 만큼 불충한 노릇이다. 이렇게도 내외에 인재가 없으니 나라일이 장차 어찌되려는지 통탄할 노릇이야.”
“이러한 태평성대에 감히 활빈도를 자처한 발칙한 놈, 도적 수괴의 목을 베어 장대에 높이 달아 백성들에게 꼭 보여주어야 한다.” - 황석영, <장길산>에서
[학생작품]김미연 충남여고 3학년
‘그들만의 천국’에 대한 정당한 항거
▲ 김미연 충남여고 3학년 |
전제왕권이 존재하던 때에는 역성혁명이나 반란으로, 민주주의가 보편화 된 이후에는 대화와 토론, 시위 등의 방법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대응 방법이 모여 결과적으로 나라와 역사를 진보하게 했다. 제시문의 장길산도 이와 유사하다.
제시문 (가)의 도적은 당시 사회 구조적 모순의 전형이다. ‘큰 도적’인 관리는 자신의 권리를 남용하여 백성을 수탈하고 자신의 배를 채울 뿐, 백성을 다스리고 돌보지 않았다. 그는 백성들이 수탈로 인해 고통 받고 있어도 ‘그들만의 천국’을 태평성대라 부르며 장길산과 같은 도적을 무뢰배라 정의한다.
제시문 (나)의 도적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이다. 장길산은 관아를 약탈하고, 관리들을 죽였으며, 병졸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관리들이 말하는 ‘무뢰배’나, 세간에서 말하는 보통 도적이 아니다. 그가 살고 있던 당시 관리의 모습은 제시문 (가)에 잘 나타나 있다. 장길산은 그러한 관리들에게 저항하여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관아를 약탈하였으며, 빼앗은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은 ‘그들만의 천국’을 ‘우리들의 천국’으로 바꾸려는 항거이다.
장길산이 보여준 행동은 저항권을 행사한 것이라는 점에서 정당화된다. 저항권이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국가권력의 불법적 행사에 대하여 그 복종을 거부하거나 실력행사를 통하여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권리가 백성에게 주어졌을 리는 없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관리들은 특별한 제재 없이 권한을 남용하여 부를 쌓았고, 백성들은 고통에 빠졌다. 장길산이 복종을 거부하고 관아를 약탈한 것은 백성으로서의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장길산의 행동은 사회의 모순을 시정하려는 시도로서 정당화 될 수 있다. 만약 그가 관아를 약탈하고 병졸들을 사로잡으며, 관리를 죽이는 것으로 그쳤다면 그것은 단순한 저항권을 행사한 것이다. 그러나 장길산은 관아에서 양곡과 무명을 약탈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 백성들은 한 해 동안 힘들여 지은 농사의 수확물 대부분을 관리에게 내야 했다. 이 때문에 열심히 일한 백성들은 노동의 대가도 받지 못했고, 오히려 관리들이 자신들의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장길산은 백성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노동의 대가를 관아에서 빼앗아 민중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는 일한 자가 대가를 받지 못하는 당시 사회 구조를 개선하려는 시도이다.
역사 속에서 민중들은 ‘소수의 태평천하’를 ‘다수의 태평천하’로 바꿔보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우리나라의 4·19혁명이나 광주 민주화 운동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런 노력들이 조금씩 모여 현재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만들었다. 장길산의 행동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행동이 당장 사회를 크게 바꾸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바뀌어 갈 수 있도록 지침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며 정당하다.
[논제분석·출제의도]사회적 모순 해결방법 제시돼야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야기되는 갈등은 다양하다. (가)에서는 권력을 남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부당한 지배체제를 제시하고 있다. (나)에서는 민중의 생존권을 위해 지배자의 수탈에 저항하는 상징적 인물을 제시하고 있다. 두 제시문에서 알 수 있는 갈등 양상을 파악하고 현대적 관점에서 정당성 여부에 대해 개진해야 한다.
우선 ‘도적’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분석해야 한다. 지배체제를 상징하는 감사의 탐욕과 부정부패의 폭력성을 제시하고, 부패한 관리를 응징하고 저항하는 폭력성을 비교하여 논해야 한다. 부당한 지배에 대항하는 폭력의 정당성 여부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 개인의 저항과 구조 개혁에 대한 근거가 제시되어야 탄력적인 논의가 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법과 절차, 토론과 대화, 민주정치와 민주시민 등 현대적 관점에서 제시되어야 우수한 글이 될 것이다. 장길산의 정당성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모순적인 사회 구조의 해결 방법이 제시되어야 한다.
[심사평] 홍경옥 충남여고 교사
폭력의 부당성에 대처할 논거가 부족
▲ 홍경옥 충남여고 교사 |
전체적인 구조에서는 국민의 기본권인 저항권의 행사라는 개인적 입장과 사회구조의 모순을 시정하려는 행동이라는 사회적 의미를 논거로 들어 탄탄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문장으로 들어가면 관아를 약탈하고 백성을 구휼했다는 내용이 여러 번 반복되는 순박한 글이 되고 말았다. 만약 저항권이 범하는 폭력의 부당성이나 대화와 협상이라는 현대적 해결책으로 논박당할 경우 대처할 수 있는 논거가 부족하다.
서론에서 보인 통시적인 관점과 결론에서 제시한 저항권의 의의는 매우 날카로운 발상이다. 좋은 글로 발전할 가능성이 풍부하다. 구체적인 제시문의 내용을 사회적, 역사적 관점으로 객관화시키는 노력도 엿보인다. 아울러 ‘그들만의 천국’, ‘다수의 태평천하’ 등 포괄적인 어휘는 독서력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다만 ‘그’, ‘그들’, ‘이’, ‘이것’, ‘이런’ 등의 지시어의 사용은 가능하면 절제하는 것이 좋다.
지시어가 가리키는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경우에는 감점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글에도 지시대명사, 인칭대명사가 많이 사용된 편이다. 논리적인 구조가 논술의 숲이라면 치밀한 어휘는 논술의 나무가 된다. 항상 숲과 나무를 같이 바라보는 자세를 지닌다면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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