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대는 지금부터 80년전 홍성공립공업전수학교로 개교해 1935년에 대전공립공업전수학교로 개편 , 초창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는 명실상부한 중부권의 명문대학으로 자리를 잡았다. 실로 가슴 벅찬 일이고, 지금의 훌륭한 모습을 갖춘 한밭대가 되기까지 애써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삼성동 캠퍼스에서 유성 덕명동 캠퍼스로 대학을 이전한 나로서는 감개가 무량하다. 내가 1988년 4월 15일 국내 최초로 대학 의장 선거에 의해 취임한 후 삼성동에 소재한 캠퍼스로서는 면적이 1만 8000평으로 협소하고 주변의 소음·진동으로 인해 교육여건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통감, 대학 이전을 결심하게 됐다. 당시 대학을 이전하려고 교육부 및 관계부처와 협의를 했으나 국가예산 관계로 승인을 받지 못했다.
그 후 1989년 4월 2일 대학이전 승인을 받고 이전 부지를 찾기 위해 대전·충남 지역 72곳을 답사하는 동안 많은 애로가 있었지만, 1990년 12월 덕명동에 위치한 임업시험장 토지 계약을 체결하고 주변에 있는 사유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임업시험장 부지는 4년 분할납부하는 조건으로 매입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정부예산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몇 번이 나 해약 위기를 겪었다. 그래서 특별법을 제정해 일반회계에서 특별회계로 처리해 토지를 매입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마침내 1994년 8월 19일 현 덕명동 캠퍼스 이전공사 기공식을 갖게 되었다.
나는 우리대학을 미국의 MIT 대학과 같은 명문 대학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야 했기에 기존의 13개 학과에서 12개 학과를 더 신설해서 25개학과로 증과하고 1공학부, 2공학부, 인문사회과학부, 교양학부 4개학부를 신설해 학부장을 단과대학 학장에 준하는 예우를 하였고 산업대학원을 신설해 1993년 3월 1일 우리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켰다. 내가 1991년 4월 1일부터 1996년 2월 28일까지 전국산업대학교총장협의회 회장과 전국국립대 총장협의회 부회장 자격으로일하면서 한밭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교육개혁과 제도개선에 힘썼다. 교육부의 산업대학 관할부서가 사회국제국으로 소속이 잘못되어 있어서 대학정책실로 이관시켰고 전문대학에 준하는 시설기준령을 4년제 대학 시설기준령으로 개정하도록 했다.
나는 한밭대를 국내 제일가는 국립대학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산·학·연 협동을 활성화해야했기에 교수는 방학중에 산업현장에 나가 산업체를 지도하고 학생은 실습을 하도록 해 산·학·연 컨소시엄에서 1994년 국내 제일의 우수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공급자 위주의 교육에서 수요자 위주의 교육으로 전환시켰다. 교재 개발부를 두어 새로운 정보와 이론을 삽입시켜 매년 수정보완을 거쳐 학생들의 현장적응 능력에 맞게 교재개발을 하였다.
교수의 연구증진과 우수학생에 대한 장학제도, 실험실습 자재 확보 등을 위해 학술문화재단을 설립했다. 또한 국제간의 정보와 교수·학생 교류를 위해 미국의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 호주 커튼 대학교, 영국 네피아 대학교, 일본의 동해대학교, 필리핀 사우스웨스턴 대학교 등 외국의 유명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또한 1995년에는 교목에 소나무, 교화에 백목련, 교조에 독수리를 대학의 상징물로 정하였다. 한밭대는 취업이 잘되는 대학, 교육 내용과 시설이 좋은 대학, 교수진이 좋은 대학으로 소문이 나서 입시경쟁률도 높아져 국내 명문대학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대학을 이전하고 지금의 유성 덕명동 캠퍼스 전경을 볼 때 그 당시 어려운 여건 속에서 8전 9기의 정신으로 캠퍼스를 이전했지만 지금 대학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한때는 토지대금을 못 내서 해약 위기에 직면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수십 번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8전 9기라는 표현을 썼다. 국내 최초의 총학장 선거에서 1988년에는 간접선거, 1992년에는 직접선거로 당선되어 8년의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퇴임했다. 현재는 한밭대 명예총장과 행정도시 자문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협조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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