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하루를 온전히 자유일정으로 마련한 것이 좋기도 하면서 걱정도 되는 모양이었다. 숙소의 위치를 확인하고 가까운 지하철역, 백화점, 아케이드, 박물관, 대학교, 심지어 점심과 저녁식사를 할 음식점까지 정해 놓고 있었다. 인터넷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학생은 인터넷 카페를 들어가서 그쪽 친구들로부터 옷가게도 여럿 소개를 받았다고 자랑이었다. 짐작한 바대로 젊은이들의 취향은 중국보다는 월등히 일본 쪽이었다.
해외연수 겸 여행지로 일본을 정한 데에는 올해가 조선통신사 파견 400주년이라는 점도 작용을 했다. 부산에서 오사카까지 뱃길로 왕복을 한 것도, 그리고 김인겸의 ‘일동장유가`를 수업시간에 다룬 것도 그 때문이었다. 1763년 8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11개월이 걸린 조선통신사 사절단에는 삼방서기 김인겸이 들어 있었다.
서울에서 육로로 부산, 부산에서 해로로 대마도, 이키섬, 세토 내해, 오사카, 다시 육로로 오사카에서 에도까지 왕복 6,600여 리를 다녀온 그는 일본에서 견문한 것들을 모아 총 7,000행이 넘는 방대한 장편가사를 만들어냈다. 관찰력과 기억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연수를 준비하면서 나는 이런 말로 학생들과 약속을 했다. “그 옛날 조선통신사의 관찰력과 기억력을 견지할 것, 그리고 내가 일본에 진출한다면 어디? 무엇?…이라는 물음을 한시도 놓치지 말 것.”
돌아오는 날 저녁, 승선 수속을 마친 학생들에게 이번 연수를 마무리하는 소감을 한 편씩 글로 쓰게 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늦게까지 객실에서 평가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오갔던 몇 가지 사례들을 소개해본다.
일본 남학생들의 옷차림이 독특하다는 것. 신사이바시에서 본 젊은 남자애들 중 열이면 아홉이 줄줄 흘러내리는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아마 조만간 현해탄을 건너 서울에서부터 유행이 시작되지 않을까 짐작 가능하다는 의견들이었다. 그런데 그 청바지 뒷주머니에는 예외 없이 긴 장지갑이 꽂혀 있었고 그것들이 대개는 루이뷔통, 프라다, 혹은 펜디 같은 명품들이었다는 것이다.
타코야키의 품질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 타코야키의 본고장답게 오사카에는 가는 곳마다 가게들이 있었다. 그런데 도톰보리의 다코야키가 오사카성의 타코야키보다 먹기가 수월하고 맛이 더 좋았다고 한다. 그 맛은 문어 조각과 가쓰오 부시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느냐 하는 데 따라 결정이 되며,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먹기가 좋아야 한다는 점, 즉 속이 뜨거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동티켓판매기 한 대가 두 사람 몫을 하고 있다는 것. 열댓 개 식탁이 가득한데 일하는 사람은 주방에 두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이쪽저쪽 입구에 각각 하나씩 두 대의 자판기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손님이 자판기에 돈을 넣고 티켓을 끊어 주방에 갖다 주는데, 돈을 넣는 것은 계산하는 것이고, 티켓을 주는 것은 주문하는 것이었다. 라면집에서 자판기 한 대로 주문과 계산을 해결하는 것을 보고 일본이 자판기의 천국이라는 점을 실감했다는 것이다.
다 듣고 나도 한 마디를 덧붙였다. 창업도 취업이고 해외진출도 취업인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 조선통신사 사절이 1764년 처음으로 고구마를 들여왔다는 것. 그때 그 김인겸이 여기 공주 출신이고 ‘일동장유가` 노래비가 지금 공주 금강 변에 세워져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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