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 아더왕자 찾으러 모험 떠나자
역설과 전복 사라진 뒤끝은 ‘허전’
‘슈렉 베이비` 돌보느라 정신없을 너에게 편지를 쓴 건 묻고 싶은 게 있어서야. “왜 그렇게 점잖아졌니?”
아빠가 되어서? 아빠가, 어른이 된다는 거는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는 거고, 괘 부담스런 일이긴 하지. 그렇다고 좋은 아빠가 꼭 교훈적이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봐. 아니 까놓고 너까지 교훈적이 돼야 하겠니? 네가 너답지 않느니 영화가 재미없어졌잖아.
처음 만났을 때 너는 동화책을 북북 찢어 밑을 닦았어. 그게 슈렉이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화들은 밑 닦아 버리고 화끈하게 뒤집는 거. “세상 잘 난 것들은 다 가라” 같은 거. “그래서 왕자님과 공주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가 아니라 “어디 괴물 같은 외모로 잘 사나 두고 봅시다” 같은 뒤틀린 결론. 포스트모던하고 신선한 전복의 쾌감이 슈렉의 매력이라고.
물론 이번 ‘슈렉 3`에도 그런 게 나오긴 해. 악당들의 습격 와중에도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아직 잠이 덜 깼고, 신데렐라는 청소하느라 여념이 없으며 백설공주는 예쁜 척 하느라 친구가 없지. 이들 공주들이 감옥을 탈출하는 장면은 ‘반지의 제왕`의 패러디이고, 정통성 없는 군주와 결박당한 슈렉이 군중 앞에서 벌이는 막판 대결은 ‘글래디에이터`를 보는 듯하지.
그런데 말이야. 이번 건 풍자를 통해 뭘 비꼬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반지의 제왕`의 패러디도 그렇지만 다른 영화에서 끌어다 쓴 패러디도 뭘 패러디한 건지 알아보기 쉽지 않다고. 원작을 비트는 풍자적 시선이 없는 패러디는 화면 복제일 뿐이야.
그런 점에선 악당들이 훨 낫다고 봐. 후크 선장, 마녀, 외눈박이, 목 없는 기사, 신데렐라의 의붓 언니, 백설공주의 계모 왕비…. 요즘 유행어대로라면 동화나라의 ‘슈레기(쓰레기)`란 슈레기는 다 모였지. 이 슈레기들이 관객들에게 묻잖아. 당신들이 한 번이라도 악역의 고충을 헤아려 본 적이 있었느냐, ‘악인`으로 낙인 찍혀 살아가야 하는 아픔을 아느냐고 말이야.
그런 앙탈이 더 슈렉답지 않니? 그래봤자, “남들의 시선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눈으로 스스로를 보라”는 아더의 말에 꼬리를 확 내리는 걸 보면 김이 팍 새지만 말이야.
슈렉, 네가 점잖아졌다고 뒤집기가 미덕인 영화마저 다소곳해 져야 하는 건지 정말 안타까워. ‘슈렉 3`은 네가 아버지가 되는 거와 왕위를 이을 아더를 찾아가는 모험극이 주요 테마잖아. 그렇다면 냉소적인 아웃사이더인 네게서 ‘왕`과 ‘아버지`라는 두 가지 코드가 충돌할 때 생길 법한 재미가 있었을 텐데, 그런 걸 잡았으면 낫지 않았을까 싶어. 전복과 역설의 쾌감이 사라진 빈자리엔 단발적인 개그와 나른한 교훈만 남았으니 한숨만 나온다.
오밀조밀한 재미야 있지. 이만하면 무난한 속편이랄 수도 있어. 하지만 ‘슈렉`은 무난함과는 ‘겁나 먼` 지점에서 미덕을 보여준 영화였잖아. 짜릿한 ‘한방`이 없으니 성에 차지 않아.
교훈극이 즐겁지 않다는 걸 가르친 건 너 자신이었잖아. 그래서 결론은, 그것도 네 대사에 나오더구나. “돈 내고 구린 작품 보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또 없다니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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