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우리 정치동네에서 빚어진 젖떼기 논쟁도 성격상 이와 비슷하다. 합당을 선언하기 조금 전의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언제까지 DJ에게 의존하는 유아기적 정치를 할 건가 하는 반성을 해본다. DJ의 젖을 뗄 때가 되지 않았나…”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롤랑 바르트를 생각해봤다.
바르트의 주장인즉 젊은 베르테르가 고통스러운 것은 로테와 다른 남자의 약혼이 아니라, 그녀가 다른 남자 품에 안긴 이미지였다는 가설이다.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속뜻은 깊다. “유아기적 정치를 할지”에 대한 반성적 전제가 진심이라면 어미 입장에서는 자식 키운 보람을 느끼며 선선히 품에서 떼어내야 현명하다.
빨던 젖을 버리고 다른 젖을 찾아 나서겠다는 배신이 아닐진대, 어떤가, 그게 자식사랑 아니겠는가. 해서 사랑(amour)이란 단어가 젖꼭지(amma), 유방(mamma), 유두(mamilla)에서 유래했다는 키냐르의 주장을 이 아침 강력히 지지하고 싶다. 계속 젖을 먹이겠다는 것은 현실정치에의 개입이고 계속 받아먹으려 들면 정치적 빌미가 된다.
그런 의미로 한국정치는 종속에서 독립으로 관계 전환을 추구하는 청소년기 같은 심리적 이유기(離乳期) 상태에 놓여 있다. 젖꼭지를 버려 정치적 자립을 하겠다는 의지다. 정치도 벡터 개념처럼, 힘의 진로를 90도 선회하려면 현재 힘의 180도 방향으로 가야만 하는지 모른다. 젖 안 먹겠다는 선언이 과격해 보여도 개혁을 위해 혁명의 걸음법을 잠시 빌릴 필요는 있다.
젖을 신나게 먹던 쪽(민주당)에서 바라던 의도, 젖떼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쪽(열린우리당)에서 바란 의도, 젖떼기 선언을 쌍수 들고 환영한다는 쪽(한나라당)이 바라는 의도는 명백히 다르지만 명백한 공통점이 있다.
정치발전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바로 그 점이다. 각 후보, 각 정파, 특정인의 상호의존성으로 젖가슴을 더듬는 것, 다 컸다고 젖떼겠다는 데 한사코 젖을 물리는 것도 볼썽사납다. 과거는 과거, 경험은 경험이다. 알파맘과 베타맘 논쟁 언저리를 헤매는 어중간한 대응은 어영부영 젖먹이 정치를 연장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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