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런 글을 썼다. 서포(西浦) 김만중에게는 대전이 ‘본가`이며 작품의 ‘본향`이므로 발자취가 서린 대전을 ‘문학적 산실로 재현`하자는 요지였다. 남자 주인공이 8선녀 꽃밭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다 눈을 뜨니 일장춘몽이더라는 ‘구운몽`을 다시 읽고서 17세기 판타지로 인생무상을 설파한 서포의 상상력에 고개가 숙여진다.
상상력은 빼고, 서포가 부러운 이유는 따로 있다. 그 시절을 살았다면 필자가 탐냈을 홍문관 대제학 자리도 아니요, 서포가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한국 고전을 꽃피웠다는 데도 있지 않다. 길쌈을 해서 공부시킨 어머니 해평 윤씨에게 바치려고 언문(한글)으로 책을 지은 효심 또한 대단하다.
무어니 해도 부러운 것은 글 쓰는 자세다. 서포는 당시 우의정 임명이 “장희빈 덕분”이라는 시중 여론을 전하다 말의 출처를 대라는 숙종의 집요한 추궁을 받지만 취재원을 공개하지 않고 한 많은 귀양살이를 택한다. 그에 대한 처벌 내역을 쓰라는 왕명에도 사관들은 “이 붓은 역사를 쓰는 붓”이라며 끄떡하지 않았다.
서포와 함께 또 한 분의 사표(師表)는 서포보다 꼭 100년 뒤에 태어났고 한국의 셰익스피어에 비견되는 연암(燕巖) 박지원이다. 본지 기자가 중국 하북성 승덕시(열하) 당국자를 만나 그곳 피서산장에 연암의 기념비 설립을 요청하자 “적극 검토하겠다” 했다던 바로 그 기사에 등장하는 연암이다.
연암은 국정 홍보 이외의 이단적 사유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정조에게 정면으로 씹힌다. ‘열하일기`를 깊이 읽은 정조는 당대 문풍(文風)의 잘못을 연암에게 덮어씌워 결자(結者)가 해지(解之)하라고 다그쳤다. 연암도 연암답게 왕명을 거부한다.
돌이켜보면 조선 숙종 때 왕권이 가장 시퍼렇게 강했던 것은 권력과 언론의 긴장관계 때문이었다. 눈 가리고 귀 막아서 강해지는 정권은 없다.
불견불상친(不見不相親). 선덕여왕과 천민 지귀의 엇갈린 로맨스 끝에 나온 가사가 지금의 경우에 들어맞겠다. 두 가지로 해석한다.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아라, 보지 않으면 친할 수 없네. 후배 기자들이 자기검열, ‘자발적인 언론탄압`에서 좀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마음을 실어 써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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