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문과대 소속으로 음악과와 미술과가 신설되었지만 1980년에는 예능계가 개설되지 않았었다. 고(故) 화곡(華谷) 서명원(1919~2006) 총장은 예능계야말로 국립대가 떠맡아야할 분야라는 지론을 갖고 계셨다. 사립대는 등록금 자체가 비싼데다 과열 레슨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지금은 국립대와 사립대의 등록금 차이가 크지 않지만 80년대에는 3배가 넘었다. 그러나 일부 학생과 교수들이 예능계 신설은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폈다. 사실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충남대는 1978년부터 보운에서 대덕캠퍼스로 대대적인 이전을 추진 중이었다. 1980년이면 공업교육대에 이어 문과대, 이과대만 이전한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방음벽을 갖춘 개인 연습실에 실기용 악기를 구매하고, 연주홀에 대형화실도 신축해야하는데 재원 마련이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곡선생은 소신대로 문교부에 설립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 문제는 자칫 학내 갈등으로 비화될 조짐이었다. 3월 중순 총학생회 집행부와 만난 서총장은 “교육학을 전공한 교육자로 말하는데 전인, 통합교육의 바탕은 예술이다”라고 단정하고, “지금 인가받지 못하면 충남대 예능계는 요원한 일이 된다”고 확언했다. 문예부장으로 동석한 나로서는 수긍이 갔다. 무엇보다 문화 불모지로 낙인찍힌 지역문화 발전에 초석을 놓는 계기가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간담회 후 사태가 급변했다. 이제 학내문제로 가타부타할 정국(政局)이 아니었다. 1979년 10.26 박정희대통령 시해와 12.12를 거친 신군부가 전면에 나선 것이다. ‘안개정국’ 속에 3김 중심의 정치권과 신군부의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 전국총학련은 연일 회장단 회의를 열고 정치권의 단일화를 촉구했다. 또한 신군부는 개헌일정을 조속히 밝히고 군으로 복귀하라는 성명서를 냈다. 충청권 대학 역시 수시로 시국토론회를 개최하고 서울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1980년 4월 30일, 대전시내 대학 연합시위대가 대전역 광장에 집결했다. ‘월간동아’는 그날 집회를 전국 최초의 ‘서울의 봄 대학생 교외집회’로 기록했다. 대학본부에서 시위대를 체크하던 서총장은 대전역으로 달려왔다. 후에 알려졌지만 화곡선생은 먼저 경찰진압대의 지휘관을 만나 “학생들의 순수성을 이해해 달라. 내가 책임지고 해산시키겠다. 연행이나 폭력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과잉 진압은 삼가주길 바란다”는 요청을 했다.
서총장은 총학단에게 귀교를 설득하고 선봉에 섰는데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처음부터 학생들과 함께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후 5. 17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졌고, 계엄령과 함께 휴교령이 내려졌다. 공수부대가 대학교에 진주했고 총학생회는 해산되었다. 다시 유신시대의 학도호국단 체제로 회귀한 것이다. 그리고 주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어닥쳤다. 거듭되는 연행과 도피 속에 화곡은 경찰서나 군부대를 찾아가 선처를 호소했다.
한국사회에서 대학총창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상(像)이 변해왔다. 먼저 60,70년대 독재나 80년대 신군부 정권에서는 임명권자의 그늘에서 고민하는 학자였다. 90년대는 학내 민주화 갈등을 조정하는 조정관이었다. 이제 2000년대는 ‘발전기금’으로 요약되는 CEO형의 총장이다. 그런데 화곡선생은 시대를 넘는 혜안으로 이 모든 상을 보여주고 실천한 유일한 총장이다.
전인적 교육관에 투철한 역사와 소명의식을 갖춘 진정한 지식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난 5월 충남대에 서명원총장의 흉상이 제막되었는데 생전의 인연이 새삼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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