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인간은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고 윤리와 양심의 가치가 전체 종족의 생존을 위하여 작동하는 유구한 문화적 자산이 있다 보니 이런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현실에 맞게 잘 요리해서 남의 눈치를 봐가며 자신의 에너지의 원천으로 삼아 천천히 만족시켜 나간다. 그러므로 어떤 위대한 예술 작품이나 어떤 훌륭한 위인의 인생 역정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공격성(힘과 권력)과 리비도(사랑과 애정)의 작용이나 반작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과도한 결핍으로 외부 세상에 대한 신뢰가 없는 사람이나 발달 과정의 어떤 문제로 초자아가 형성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욕망의 추구에 있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결핍된 자신의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를 인간은 배신하되 물질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심정으로 아무런 절제 없이 물질적인 것들을 탐닉하거나, 복수하는 심정으로 그런 것들에 집착한다. 본능적 욕망 추구를 제어하는 어떠한 현실적 자아의 기능도 그 결핍에 의한 강력한 흡인력을 당해내지 못한다.
초자아의 기능이 마비된 경우 욕구 충족 방식에 대한 어떠한 이상적 양심적 브레이크도 없고 동반되는 죄책감과 수치심도 없다. 돈은 현실적으로 이런 자신의 욕망 추구에 가장 적절한 매개체이다. 돈이 있으면 자본주의 사회에선 그 진정성이야 어쨌든 간에 현실적으로 권력과 애정을 획득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조직 폭력배 집단은 결국 조직의 의리나 질서보다는 원천적으로 자신의 욕구 충족에 더 관심이 많다. 조직에 대한 섬김이나 동료에 대한 의리도 낮은 수준의 자아나 초자아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영화에 나오는 의리 있는 조폭 이야기는 조폭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 먹히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당연히 조폭은 근본적으로 섬김과 의리보다는 돈에 더 집착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조폭 심리가 더 작동하는 사회냐? 아니면 이성과 양심이 작동하는 사회냐?’는 전적으로 그 조직사회의 책임이다.
비단 조폭 만이 문제인가? 한 사회의 권력층이 조폭보다도 더 조폭스러운 심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회는 이미 끝장이고 아래에서 조폭은 활개를 칠 것이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욕망의 노예가 된 하이에나처럼 살 것인가? 더불어 함께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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