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와 놈이가 했던 사랑이 세상을 바꾼다”
세련된 의상·헤어스타일·세트 등 큰 볼거리
꿈 많은 별당아씨 황진이(송혜교). 친어머니가 천한 몸종이었다는 출생의 비밀을 듣고는 충격을 받는다. 세상이 온통 껍데기뿐이라고 여기게 된 진이는 소꿉친구였던 놈이(유지태)에게 몸을 내주고 그날로 기생들의 거리인 청교방으로 들어가 명월이 된다. 입을 앙다물고 다짐한다. “이 세상을 내 발 밑에 두고 실컷 비웃으며 살거다.”
진이에게 남은 건 위선적인 양반네들을 실컷 비웃고 조롱함으로써 자신의 선택이 옳았고 자신이 떠나온 곳이 낙원이 아님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것뿐이다.
홍석중의 소설 ‘황진이`의 황진이는 그 어떤 황진이보다 뜨겁다. 시대와 성(性)의 벽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길 원했던 여인, 요구된 윤리에 맞서 욕망을 사르고 새 시대를 꿈꿨던, 치열한 삶을 살았던 여인이다. 한편으론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또 주위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그들을 위하는 인간다운 모습도 보여준다.
장윤현 감독은 홍석중의 소설을 원작으로 가져오되 진이와 놈이의 로망에 초점을 맞춘다. 벽계수며 서화담이며 원작의 풍성하고 다단한 가지들을 쳐내버리고 단아한 멜로드라마로 빚어냈다.
장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황진이와 놈이가 했던 사랑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시대의 금기를 뛰어넘는 자유의지다. 그것이 없으면 결국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황진이가 했던 것처럼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고 밝혔다.
화적의 두목으로 사람들에게 의적 소리를 들었던 놈이가 결국 관아에 붙들려 처형 하루 전날 진이와 옥사의 문을 사이에 두고 마지막 정을 나누는 장면에 집중한 것도 그런 뜻일 터.
그러나 영화는 폭발하지 못한다. 굴곡 많은 황진이의 삶을 그리면서도 지루하다. 기생 명월이를 둘러싼 사내들의 애욕이 질척거리지 않고 드라이하게 처리된 건 그녀의 고고한 자태를 두드러지게 만들지만 걸쭉한 입담과 오밀조밀한 재미들을 걷어가 버렸다. 진이와 놈이의 마지막 옥사신도 차근차근 쌓아둔 정회가 폭발하는 지점이 아니라 미처 말하지 못한 걸 다급하게 고백하는 듯 낯설다. 너무 단아해서 감히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단아해서 무겁다.
빠른 전개의 ‘달리기`식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이 ‘황진이`의 ‘느리게 걷기`식 구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볼거리만큼은 확실하다. 4년간의 기획과 71억 원의 제작비, 7개월간의 촬영 기간이 증명해주듯 영화는 때론 스펙터클하고 때론 섬세하다. 원색조의 톤을 자제하고 되도록 자연광을 활용해 전체적으로 화면은 어두우면서도 절제된 느낌이 들지만 음식 의복 건축물 등 곳곳에서 묻어나는 16세기의 화려함과 절제미의 발견은 영화의 또 다른 즐거움이라 할 만하다.
코스튬 드라마라고 할 만큼 ‘극도로` 화려한 의상과 헤어스타일은 미학의 정점을 느끼게 한다. 녹색과 청색, 검정색의 의상은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주며 금강산, 담양 소쇄원, 남원 광한루, 남산 한옥마을 등 전국 8도를 돌아다니며 담아낸 절경에 눈이 즐겁다. 마지막 장면을 금강산에서 찍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당당하고 인간적인 황진이, 그녀와의 만남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6월 6일 개봉. 15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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