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적인 감각이 정서적인 것으로 분화가 되고 여기에 인지적인 것이 붙어서 감정과 관련된 언어를 구사하게 되면 비로서 성인다운 감정의 인식이 생기고 다른 사람에게 언어적이고 논리적인 정서의 표현이 가능해진다. 우리 말에는 이런 원초적인 표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거나 간덩이가 부었다는 식의 서술에서 신체적인 감각을 뛰어넘어 우리의 내장 기관과 감정을 연결시키고 있는 언어적 습관을 아직도 관찰할 수가 있다. 사람의 마음은 참 복잡하다.
우리가 쉽게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도 알고 보면 그 안에는 신체적인 감각과 정서적인 것 그리고 인지적인 것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른바 초자아라고 불리는 양심과 이상에 관련된 마음의 기능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이런 감정의 발달이 필수적이다. 즉 죄책감과 수치심이 발달해야 ‘해서는 안 되는 것`과 ‘해야만 되는 것`에 대한 생각이 우리 마음 속에 자리 잡는다. 즉 부모가 해서는 안 되는 나쁜 일이라고 꾸중을 하실 때 느끼는 생리적인 변화가 감지되야 죄책감이 발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혼 날 때 느껴지는 얼굴의 뜨거운 열감과 호흡과 맥박이 빨라지고 식은 땀이 등줄기에 흐르는 불편함이 죄책감과 수치심 같은 감정을 피해야 하는 어떤 중요한 감정으로 만들어 준다. 그런데 ‘해서는 안 되는 것`과 ‘해야만 되는 것`에 대한 어린 시절의 부모님의 훈육이 없거나 애초에 뇌기능의 어떤 미세한 결함이 있어서 생리적인 변화와 감정이 연결이 안 되는 아동들은 초자아의 기능이 발달을 못한다. 즉 죄책감과 수치심이 없다. 도저히 상식적인 이해가 되지 않는 망나니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들은 이런 사람들이다.
이들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낄만한 상황에서도 과거의 그런 경험이 워낙 없거나 혹은 이에 상응하는 생리적인 불편이 없어서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사회 조직에서는 배척되기 쉽고 결국 집단에 소속되지 못한 외로운 하이에나처럼 으르렁거리거나 조폭 집단의 전설적인 행동대장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학교나 사회에서 조기에 발견하여 반복적인 훈육으로 양심을 가르쳐야 한다. 스스로 깨칠 수 없음으로 학습시키는 것이다. 그런 학교정신보건체계가 필요하다. 그들도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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