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선물까지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판에 저건 괜찮을까, 모른 체하고 넌지시 판매사원에게 물어봤다. 정 마음이 께름하면 옛 스승들에게 보내면 된다는 식의 대답이 돌아온다. 더 이상 편의를 봐줄 수도, 봐줄 편의도 없는 분들에게 보내면 순수한 선물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일리 있는 응답이다. 그러니까 그 젊은 여성은 선물과 뇌물을 은연중 구분하고 말했던 것이다. 특별히 편의를 보아 달라는 뜻이 담겼으면 뇌물, 물품 그 자체는 선물, 이런 사전적 정의로 구분 안 되는 선물도 물론 있다. 사전적 정의도 문제가 많다.
마음은 쏙 빼두고 물건만 달랑 가는 선물이 있느냔 말이다. 둘 사이가 하늘땅만큼 차이나는 것도 아니고, 머리카락 하나 차이일 수도 있다. ‘기브앤테이크’가 기본인 냉철한 비즈니스 세계라면 차이를 거론하는 것조차 고리타분한 노릇이다. 아니, 우리네 인생 법칙도 상당히 그렇다.
충남교육청에서 3S운동인지를 벌이는데, 거기에 ‘더치페이’가 들어 있다. 좋은 의도로 내가 먹은 것을 내가 내는 각추렴은 합리적이다. 그런데 효과 면에서 번갈아 내주기와 똑같이 되어버리거나, 그것까지는 몰라도 어느 한 사람이 내느니만 못할 때가 있는 법이다.
갑과 을이 날마다 점심을 같이 먹는다 할 때, 더치페이는 단지 교환인데 비해 서로 내주기는 선물이다. 등가성만 잘 유지되면 경제적 이득 이상의, 교환가치에 따른 계산 이상의 훈훈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갑이든 을이든, 하루걸러 상대에게 너끈히 점심을 ‘쏠’ 수 있는 효과다.
합리주의냐 정서주의냐 문제일 수도 있다. ‘양주 5병은 뇌물, 점심 4만5000원은 사교’라는 판결이 세간의 화제가 됐었다. 그러나 선물은 얼마간은 뇌물의 성격이 있다.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선물, 있으면 뇌물인 것은 공식이 아니다. 선물의 회색지대가 뇌물이지 선물은 죄가 없다.
이 아름다운 감사의 달에 뇌물이 될까 무서워 금하느니 물건과 자신의 가치를 높일 선물을 찾는 편이 더 낫다. “마음만 받겠습니다”는 마음마저 받지 않겠다는 어의(語義)로도 전락한다. 내 마음을 주는 것이나 상대의 마음을 사는 것이나 때로 피장파장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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