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못되길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안키세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인 아이네이아스가 아버지를 업고 불길에 휩싸인 트로이를 벗어났다는 얘기 같은데,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말이 철칙은 아니라도, 어른들 시각으로 자식을 기르는 우리 사회에는 부분적으로 맞다.
빗나간 부정으로 고생하는 재벌그룹 회장을 보고 무심히 지나쳤던 사르트르를 음미해보게 된다. 피투성이 아들싸움에 조직폭력배보다 더한 거라도 동원하고 싶은 세상 부모의 마음일지 모른다. 본인이 직접 해결하는 것이 전형적인 조폭적 사고라는 심리학자 의견에는 동참하고 싶지 않다.
아버지 되기는 쉬워도 아버지 노릇하기란 재벌회장이나 대통령이나 똑같이 어렵다. 주먹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게 또한 자식교육의 경우다. 본의 아니게 폭력을 가르친 건 그중 가장 큰 손실이다. 가부장적 권위 밑에서 자랐으나 권위를 빼앗긴 아버지 부재 시대의 아버지들도 마찬가지다.
일부 학교에서는 요즘 어머니 일색인 학운위와 자모회 관례를 깨고 아버지회를 구성해 뉴스를 탔다. 교육에 아버지 따로, 어머니 따로는 없기에 과잉보호나 신(新)가족주의로 안 흐른다면 찬성이다. ‘파란 자전거’, ‘날아라 허동구’, ‘우아한 세계’ 같은 영화에서도 아버지들은 눈물겹도록 열심들이다.
다 좋다. 외국 어떤 학자는 그러잖아도 한국의 과도한 어머니 교육열을 자신의 자존심을 위한 ‘모성애 장애’로 보고 있다. 비교하면 재벌2세 아버지는 제 역할을 했다기보다 역할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한 ‘역할 누수 신드롬’에 가까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동형처벌(同型處罰)이 없었다면 아버지가 반교육적 인종이라는 사르트르의 껄끄러운 독설을 재인용하는 일도 없었다.
이번 건에서라면 아버지로서 속으로 울고 겉으로 위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렇게 배운 자식이면 속 썩이지 않고 저 스스로 처리했을 수도 있다. 대신 때리고 대신 맞아주는 존재가 아버지인가. 자식에게 멍에나 굴레를 씌우는 존재인가. 아닐 것이다.
반성적 시각에서, 아이네이아스 등에 업힌 안키세스, 사르트르 등뒤의 아버지 신세는 아닌지 돌아본다. 가슴에 매달린 카네이션을 보며 “누구의 아버지”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기를 진실로 원했다. 자식들도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로 자랑스럽게 불려지길 바랐다. 자식이 잘나도 걱정, 못나도 걱정이라는 말이 딱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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