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뿐만 아니라 저를 바라보는 형제들, 부모님들 모두에게도 그런 안정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어깨의 짐을 내려놓고 자유로울 수 있을 것같았습니다.
자주 급하고 욕심을 내고 무리를 했었습니다. 급한만큼 생각대로 되진않아 난감했던 적도 많습니다. 귀도 얇아지고 마음도 가볍게 흔들렸습니다. 모으기는 커녕 속된 말로 까먹고 있어 한심하기도 했습니다. 자책으로 몇날 며칠 밤잠을 못 이룬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서점에서는 자기계발서나 재테크 관련 책자가 넘쳐나고 매스컴에서는 연일 그 욕망을 자극하는 프로그램이 우리의 눈길을 잡으려 안간힘을 씁니다.
여우가 포도를 지나치듯 이것을 쫓다가 ‘내게는 저것이 어울려`하면서 저것을 쫓아보고 또 다른 것을 쫓고 했었습니다. 위를 살피면서 좌절하고 그러다 또 아래를 보고 위안도 받았습니다. 이제는 때때로 일부러 아래를 쳐다보면서 스스로를 위안할 정도의 요령도 터득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 이정도로는 턱도 없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 했습니다. 위, 아래만을 보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면... 언제나 위는 있게 마련인데...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럴 때는 왜 못 버리냐고 스스로를 꾸짖기도 했었습니다.
저만의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분들께서는 대개 제 마음 속 이야기를 들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서점에 그런 책이 넘치는 것이나 매스컴이 우리의 욕말을 자극하는 것은 우리 안에 공통적으로 그런 불안과 욕망이 있다는 반증이니까요. 어쩌면 그것을 통해 제 생각이 타당하지는 않으나 보편적임을 느끼면서 위안을 받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비록 틀렸지만 내 편이 많다고 느껴지면 푸근해지니까요.
그렇게 살았습니다. 들꽃의 향연이 완연하던, 햇살 따뜻한 날, 순간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해탈하거나 득도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리 저리 쫓기고 그 가운데 이런 저런 궁리를 하고 그러다 안도하고, 또 아둥바둥하는 것이 삶이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그게 바로 죽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말입니다. 그런 아둥거림을 벗어난 것이 자유로운 비행이라고 꿈꾸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꿈이란 생각말입니다.
호구지책이란 말이 있습니다. 죽지 못 해 산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왠지 처연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그렇게 호구를 위해 사는 것이 삶인데... 지금 이 일로 호구를 위해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집니다. 많이 소박해졌지요. 이제는 무엇을 위해 살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그 살아있음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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