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그의 영혼을 모셔다가 새로운 영혼의 안식처인 이응노미술관으로 인도함으로써 고암의 예술혼이 새롭게 우리 곁에서 피어나길 기원하는 모든 이의 뜻이 담긴 의식이기도 했다. 고인의 육신과 영혼의 안착을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래왔던 유족 박인경 여사의 북받치는 설움이 한꺼번에 씻기는 느낌을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면 누구나 받았으리라 짐작해본다.
그는 왜 그토록 긴 세월, 우리의 근대 미술사에 당당히 함께 할 수 없었을까!
개관전을 준비하는 내내 이응노화백의 작품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놀라웠던 것은 모든 작품이 한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양하다는 것이다.
수묵화에서부터 시작되는 평면화와 솜을 이용하거나 뜯어 붙이는 등의 부조의 형식 그리고 나무로 혹은 청동, 흙, 종이 등의 입체작품, 심지어 솜이나 은박지 등까지 제한 없이 펼쳐지는 그의 예술세계는 놀라왔다. 그러나 그런 다양한 제작방법이란 것이 포스트모던이나 혹은 그 만이 가졌던 어떤 개념적 예술관에서 나온 작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삶을 통해 형성된 자연스런 태도의 결과가 아닐까한다.
어린시절부터 누가 뭐라 해도 혼자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즐거웠던 그는, 양반집 자식이기에 상놈들이 하는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엄명에도 그림을 그리다 결국 글씨를 쓰라고 주시던 종이도 더 이상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어린 이응노는 밭일을 하면서, 진흙으로 범벅된 밭 위에, 땅 위나 돌, 바위 같은 데에 그림을 새기고, 나뭇가지를 깎아서 조각도 하고 눈에 뛰는 것이면 무엇이든 주워다 그리곤 했다는 것이다. 이미 그는 어디에서든 손에 잡히는 어떤 재료라도 활용하여 그 매체에 알맞은 표현을 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전형무소에서 60이 넘은 나이에 무기징역으로 복역해야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종이와 붓 대신에 밥알을 모아다가 신문지를 굳혀서 오브제를 만들기도 한 일련의 옥중시리즈도 탄생시킬 수 있었으리라. 국난 때 헤어져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자식을 기차로 15분만 달리면 만날 수 있다는데 어느 부모가 마다할 수 있었을까! 애끓는 부모로서의 심정 외에는 시대적, 정치적 한계를 괘념치 않았던 고암의 순진성은 그를 정치적 울타리 안에 가두게 했지만 작가로서의 작업에 대한 열정만큼은 막을 수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시장 맨 마지막 위치에 놓여있는 ‘만사여의`란 작품을 볼 때마다, 그가 어려웠던 때에 가졌을 마음의 기원을 떠올리게 된다. 이제 그가 고난의 시절을 보낸 이 곳 대전에서 이응노미술관 개관전을 통해 고암이 겪었던 영혼의 고통이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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